[21세기 파이어니어]「성주인터내셔널」김성주사장

  • 입력 1999년 3월 9일 19시 04분


요새 이 사람 만큼 ‘잘 나가는’ 여성이 있을까.

책 펴내자, 인터뷰하자는 요청에서 객원교수 맡아달라, 방송진행해 달라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다. 거절하고 사양하는 것도 이골이 났다.

쏟아지는 전자우편만 하루 평균 1백여통. 아침 점심 약속시간을 적어놓은 수첩에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김성주(金聖珠·43)사장.

패션유통업체인 성주인터내셔널을 설립한 지 10년. 처음에는 ‘부모 잘 만나 사업성공했다’는 소리가 듣기싫어 정신없이 일에만 매달렸다. 나라경제가 무너지면서부터는 ‘이젠 나서야한다’는 책임감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부턴가 당찬 기업인이란 평가와 함께 ‘미래형’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니게 됐다. ‘접대’없는 경영, 세계를 읽어내는 안목, 여성 전문가 네트워크 형성 등 21세기 접속코드를 완벽하게 갖춘 탓이다.

★나는 자명종이고 싶다★

IMF이후 김사장은 자주 우울해지곤 했다. 지난달 초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 다녀오면서는 부쩍 ‘증세’가 심해졌다.

다보스포럼은 전세계를 움직이는 정재계인사 2천명이 개인자격으로 참석해 의견을 나누며 미래를 예측해보는 ‘지식 올림픽’. 빌 게이츠, 손정의(孫正義)같은 정보통신업계의 제왕과 포드와 소니전자 등 다국적기업의 회장, 그리고 앨 고어 미 부통령 리콴유(李光耀)싱가포르 전총리 등 20여국 정치지도자들이 고정 멤버다. 김사장 역시 97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경제포럼(WEF)에 의해 차세대주자 1백인으로 선정된 뒤부터 ‘단골 손님’이 됐다.

“세계지도자들을 상대로 1대1로 맞붙어 논리대결을 벌일 ‘특공대’같은 한국인 전문가가 절실하다는 걸 느꼈어요. 이스라엘 인도 싱가폴 등 한국의 경쟁국 국가설명회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동안 한국관이 파리를 날리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얼마나 화가 치밀던지….”

연세대를 졸업한뒤 미국 앰허스트대와 하버드대 그리고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에서 공부했다. 88년 귀국하기까지 뉴욕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에서 최고급 소매 유통현장을 보고배웠다. 고독한 유학생활과 독하게 일한 14년 외국생활이 오늘의 김성주를 만들어낸 바탕이 됐다. ‘대성산업 막내딸’이란 프리미엄은 내버린지 오래다.

“어려서부터 선진국 경쟁력의 요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제가 할일은 단 한가지, 잠자고 있는 한국인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자명종’역할을 하는 것이죠.”

★여성이여 깨어나라★

김사장의 올 화두(話頭)는 단연 정보화다. 특히 정보혁명이 여성들에게 ‘복음’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구촌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전세계를 상대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김사장만의 것이 아니다. 세계은행도 최근 개발도상국 경제개발의 관건은 개도국여성의 정보화 마인드 확립에 달렸다는 내부결론에 도달했다.

김사장은 그러나 ‘관념적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도전하는 여성기업인일뿐이다. 하지만 한국의 재기를 위해 여성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 만큼은 확신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는 ‘2천3백만’명입니다. 전국민이 달려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절반인 여성 인력을 팽개치고 무얼하자는 건가요.”

김사장은 이제 곧바로 창의력과 유연성에 바탕을 둔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된다고 단언한다. 감수성 풍부한 여성인력의 역할이 어느때보다 강조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치마입기를 거부한다. 치마입은 여성기업인을 ‘여자’로 바라보는 시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하고 화끈한 것이 좋아 빠짝 자른 머리스타일을 15년간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실 전 너무 많은 걸 갖고 태어났어요. 넉넉한 가정환경에 최고의 교육 환경,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까지. 이젠 제가 사회에 돌려줘야 할 때라고 봅니다. 저 같은 여자가 사우나에서 손톱 손질하고 파티장 찾아다니는 것이야 말로 국가적 낭비 잖아요.”

그는 유독 ‘가진 자의 의무(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했다. IMF전까지 냉소적 이기주의에 빠져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이전에는 조용히 있었느냐고 비난하는 분들이 있어요. 사실 IMF전에도 멋모르고 외쳐댔지만 모두들 눈하나 까딱 않더군요. ‘우리에겐 우리방식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그러니 ‘침묵’할 밖에요.”

김사장에겐 꿈이 있다. 20년내로 구치(이탈리아)나 샤넬(프랑스)같은 세계적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탈리아 어린이들이 48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리아이들은 12색으로 때웠잖아요. 단기간내에 색감을 따라갈 순 없겠죠. 하지만 기술과 패션감각을 조화시킨 분야에서는 자신있어요. 문제는 생산, 디자인, 마케팅을 엮어낼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죠. 두고 보세요. 제가 해내겠습니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

★프로필★

대성산업 김수근회장의 3남3녀 가운데 막내. 56년 대구출생. 서울말씨지만 대구 억양이 꽤 남아있다. 신장 1백76㎝.

이화여고를 거쳐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75학번.

96년 ‘작은 하버드’라 불리는 미국 앰허스트대가 기금마련을 위해 제작한 ‘학교를 빛낸 5인’이란 홍보비디오물에 노벨상 수상자 2명과 함께 출연했다.

하버드대 대학원재학시절 만난 영국계 캐나다인 남편과 85년 결혼, 초등학교 4학년인 딸 지혜가 있다.

약속장소 이동시간에 나는 20분을 이용한 토막 책읽기 재미가 쏠쏠하다. 요새는 인터넷서점 ‘아마존(amazon.com)’에서 구입한 ‘네트워크 지식기반’에 빠져있다.

가능하면 저녁약속은 사절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엄마노릇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일하는 사람은 행복해야 성취동기가 높다는 것이 그의 지론. 그래서 일요일은 교회와 가족외에는 누구도 ‘넘볼 수’없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