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 거리」읽기]연대앞 신촌길

  • 입력 1999년 1월 27일 19시 40분


이길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모를 리는 없다. 분명 당신의 젊은 날 한 조각은 이 길 어딘가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서울 성산로와 신촌로를 연결하는 도로. 연세대 정문에서부터 신촌 로터리로 이어지는 길. 연세로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이름으로 이 길을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냥 ‘연대앞’, 혹은 ‘신촌’이다. 어디에 가도 길의 이름을 지칭하는 팻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길은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그런 주막일 따름이다.

번지 없는 주막으로서 이 길의 역사는 깊다. 당신의 할아버지는 강화에서 인삼을 싸들고 처벅처벅 걸어왔을 것이다. 서강(西江)에서 잡은 잉어를 지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큰고개(대현 大峴), 애오개(아현 阿峴)를 넘기 전에 이 곳 주막에서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사발을 비웠을 것이다. 끌고 온 나귀는 창천(滄川) 어딘가에 묶어놓고 물을 먹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달픈 걸음으로 고개를 넘어 남대문밖 칠패시장에서 보따리를 펴놓았을 것이다. 도성을 드나들던 길손이 고개를 넘기 전에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쉬던 곳, 신촌은 주막거리였다.

1918년에는 대학이 이사를 왔다. 야소교(耶蘇敎)를 전파하러 왔던 선교사가 학교를 세우려 찾았던 이 곳은 도성에서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깝던, 그래서 적당하던 곳이었다. 조선 개국 초 하륜(河崙)대감의 이야기를 따랐다면 도읍이 될 뻔도 했던 곳이기에 명당을 고른 선교사의 마음은 가벼웠을 것이다. 이제는 하루저녁 뜨내기들 말고 사 년 짜리 뜨내기들이 이 거리에 더해졌다. ‘새터말’은 점점 더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뜨내기시절은 그 북적거림의 어디 쯤에 묻혀있는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그래서 신촌 아니고 진촌이라던 시절일지 모른다. 칭찬해주는 사람 없어도 펄렁거리는 나팔바지로 이 거리를 깨끗이 쓸고 다니던 이가 바로 당신이었는지 모른다. 이대축제의 마지막 날, 신촌시장 순대국집에서 젓가락 장단으로 신세를 한탄하던 이는 혹시 아니었는지.

당신이 떠난 후 거리의 모습도 떠났다. 새로 들어온 뜨내기들은 거리에 다른 무늬의 도배를 하고 입주를 했다. 남북통일 그날이 올 때까지 굳세게 살자고 금순이에게 다짐하던 맥주집 ‘감격시대’는 노래방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의 책’은 후미진 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어제의 책이 되고 말았다. ‘독수리다방’의 메모판도 사라졌다. 핸드폰과 호출기가 있으니 메모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이 거리에서는 무단횡단도 사라졌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유횡단이다. 이 길의 가치는 좁다는데 있다. 길 저편도 길 이편과 같은 공간으로 엮인다. 그래서 길 건너의 친구를 불러 세울 수가 있다. 그리고는 달려가서 미팅 잘 됐느냐고 물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 무단횡단이라고 단속을 시작했다. 벌금을 물리기 시작했다. 착하게만 살아오던 모범생들은 곧 다소곳이 신호등 앞에 모여 파란 불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 길은 자동차를 위해 존재하는 길이 아니다. 꾸짖을 것은 자동차의 무단종단이다. 이 길은 전체가 횡단보도여야 한다. 자유횡단권은 다시 찾아와야 한다. 차가 막힌다고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이 곳의 인도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폭 3m의 인도는 정말 터져 나갈 것 같지 않은가? 신문 판매대도, 떡볶이 좌판도 그 폭에 끼어 사는 모습이 보이는가? 신경질적으로 눌러댈 경적도, 전조등도 없다고 우리의 젊은 보행인들을 길의 구석으로만 내모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차도는 좁히고 인도는 넓혀야 한다. 이 길에서 자동차가 보행자의 속도보다 빠르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 차가 더욱 막혀 다시는 차를 타고 이 길을 들어설 엄두가 안 나게 만들어야 한다.

이 좁은 거리에는 건물들도 올망졸망하다. 이 거리에서 건물의 특이한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거리를 면한 한 면만 보이고 그나마 간판에 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기는 중요하다. 길의 크기에 맞게 작은 건물들이 아웅다웅하며 서 있는 거리에 웃자란 건물들이 몇 등장했다. 조카사위가 벌초하고 지나간 묘처럼 거리가 들쑥날쑥해지기 시작했다. 볕도 잘 들던 이 길은 건물의 키가 커질수록 어두워질 것이다. 그런 거리는 아무리 화려해도 아름답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주막의 주모는 젊을수록 좋을지 몰라도 거리는 늙을수록 좋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나이를 헛 먹었다. 1959년에 문을 열었다는 복지다방을 필두로 홍익문고, 독수리다방 등의 몇몇 가게들이 근근히 이 거리의 세월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이들도 발빠르게 새로운 뜨내기의 입맛에 맞춰 옷을 갈아입었다. 이 길의 상징인 독수리 다방의 변신이 그 모습을 대변한다. 지하 1층부터 차례로 오락실, 빵집, 다방, 당구장, 만화방, 노래방, 인터넷 카페, 맥주집을 갖춘 복합유흥단지가 오늘의 독수리다방의 모습이다. 차분히 나이를 먹고 나이의 품위를 지키기에 이 거리의 상업주의는 너무나 가볍다. 주막거리에서는 소문도 쉽게 번지는 법. 록카페, 노래방, 비디오방은 그래서 이 거리에서 그리 쉽게 팔도로 퍼져나갔다. 신촌이 한국의 대중문화사에 남긴 씁쓸한 업적들이다.

당랑거철(螳螂拒轍). 1980년대 한국은 구르는 수레바퀴를 사마귀가 막아서던 시기였다. 서로 자신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이라는 신념으로 상대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았다. 당신은 최루탄 연기 속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이 길 위에 서 있었을지 모른다. 9시 뉴스의 사각형 너머로 물끄러미 이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덥기만 하던 날, 한열이는 꽃상여를 타고 이 길을 떠났다. 사마귀는 비켰는지 깔렸는지 모르나 수레바퀴는 굴렀다. 앞으로도 그렇게 구를 것이다. 새로운 얼굴들이 이 거리에 들어설 것이다. 그들은 이한열이 누구였고 이 길의 어디에 그의 모습은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이 거리의 어느 허리를 찾아 짚어줄 것인가.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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