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판사라는 직업

  • 입력 1999년 1월 22일 19시 34분


어느 현직 고위판사의 법관론이 흥미롭다. “판사라는 자리는 외로운 자리다. 어릴적 홍역에 걸렸을 때 방안에 격리돼 창밖에서 친구들이 뛰어 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처럼 욕구불만에 빠지기도 한다. 판사의 일은 감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메말라져 처에게 야단맞은 때도 많았다. 판사가 치러야 하는 가장 큰 희생은 사람들과 멀어져야 하는 것이다.”

▽판사는 ‘이익’이 아닌 ‘공적(公的) 봉사’라는 잣대를 갖고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들에게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하는 것은 편견없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판사는 직업이라기보다 신이 내린 소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스스로를 법복 속에 가두는, 보통 사람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거기에서 가치를 찾는 사람이 진정한 판사다.

▽갑갑한 생활의 연속이다보니 때론 자유로운 변호사로의 탈출을 꿈꾸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3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법복을 벗으려는 판사가 늘고 있다는 소식은 우울하다. 인사적체와 격무, 잇따른 법조비리사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판사직이 매력을 잃고 있는 듯하다. 명예심으로 버티기에도 이젠 한계에 달했다는 판사들의 토로다. 당장 재판부의 무더기 공백이 우려된다. 근본적으로는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추락이 가져올 악영향이 문제다.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가게 된다.

▽대전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쪽으로 튀는 양상이다. 옥석을 빨리 가려내 ‘도매금으로 넘겨진’ 다수 판사들의 명예를 되찾는 일이 시급해졌다. 미국의 27대 대통령을 지낸 뒤 대법원장을 역임한 윌리엄 태프트처럼 판사 직분을 소중히 여기는 판사가 늘어나야 한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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