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50)

  • 입력 1998년 9월 14일 19시 03분


제2장 달의 잠행 26

한 시간쯤 꼼짝 않고 누워 있던 나는 실내 슬리퍼를 끌고 창문의 방충망 문을 열고 창틀을 타 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덕길을 타고 윗집을 향해 살금살금 오르기 시작했다. 만월이었다. 만월이구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 달은 고래처럼 커다란 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길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어둠의 결이 너울너울 머리 위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다섯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것이 소용 없자 곧바로 블라인더가 쳐진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열리더니 규가 아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눈 속엔 무슨 이런 짓을 하느냐는 금지의 뜻이 완연했다. 그러나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폭발물의 뇌관을 닫듯이 황급히 현관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의 집은 화가나 사진가의 작업실같은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진 집 같았다. 밖에서 볼 때는 2층일 줄로 알았는데 천정이 높은 홀과 드러난 목조 계단과 기울어진 천장의 다락방들을 가진 훨씬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내가 오기 직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단지 오디오에서 리스트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이런 위험한 짓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나무라는 듯이 깍듯한 경어를 썼다. 그는 기분에 따라 어린 여자를 대하듯이 반말을 하기도 하고 깍듯한 경어를 쓰기도 했다. 경어를 쓸 때면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예요. 오늘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자신이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 말을 중단했다. 그러나 달리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를테면 보고싶어서 왔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약속은, 실은 약속이라고 하기 어려운 거요. 잠정적으로 늘 깨어질 것이 예정되어 있는 약속이지. 그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물 위에 띄워놓은 부표 같은 것이오.

그는 설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그 뿐인 것에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실내복차림으로 창틀을 넘은 것이다. 거의 20분쯤이 흘렀을 것이다. 그는 그저 커다랗고 검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은 ‘헝가리안 랩소디요.’라고 한 것 뿐이었고 그가 단 한번 움직인 때는 포도주를 한 잔 가져다 줄 때 뿐이었다.

실내는 소파 세트와 오디오와 장롱처럼 큰 스피커들과 텔레비전이 있을 뿐 큰 공간에 비해 텅 빈 느낌이었다. 멀리 살림살이가 조금 드러난 주방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입을 다문 나에게 말을 붙이지도 않았고 나를 거의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 허락없이 틈입한 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그는 단지 나의 어깨를 몇번 토닥거려 주었다. 나는 모멸감을 느끼며 그 집에서 나왔다. 그는 재빨리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편협하고 냉정한 영감쟁이 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데도 혐오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순간 지독한 상실감이 이미 나를 해치고 있을 뿐이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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