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45)

  • 입력 1998년 9월 8일 18시 37분


제2장 달의 잠행(21)

―당신은 내 인생에서 한번쯤 만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여자요. 당신은 어때요?

―난 상상해 본 적 없어요. 당신이든 어떤 다른 남자든. 누군가 다른 남자가 내 인생에 필요하게 될 거라고는.

―그렇게 처량하게 말하지 말아요.

―사랑에 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죠?

―난 사랑이니 하는 건 싫어요. 사랑이란 좋은 말로들 표현을 많이 하지만 실은 그럴싸하게 의미를 장식하고 마취 시켜서는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머리부터 삼키려드는 짓에 불과해. 내가 많은 한국 남자들처럼 사랑이란 걸 믿었다면 지금쯤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넥타이에 묶여 허우적거리겠지 이렇게 건달처럼 살 수 있겠소?

―좋으세요? 이 삶이?

―물론.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는 것이 걱정되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걸.

나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의 차는 기차역이 있는 소읍을 지나 국도변의 한 모텔로 들어갔다. 희디흰 인조석 벽 모서리에 빨간색의 풍차 날개가 달려 있고, 방마다 둥근 발코니가 달린 부조화하고 기묘한 모텔의 이름은 ‘초원의 빛’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록색 카펫이 깔린 복도로 들어갈 때 나는 그의 얼굴을 굳이 외면한 채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전혀 모르는 소녀같이 불안했다. 그 엉뚱한 밀회가 어떤 모습을 띄게 될 것이며, 그 게임에서 나를 어디까지 허용하게 될지, 그러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까마득히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시간의 힘과 게임의 의지에 나를 맡겨버린 상태였다. 어쩌면 당연한 상태였을 것이다. 게임에서 내가 분명히 아는 유일한 점은 그것이나 자신에 대한 훼손이라는 것 밖에는 없었기에.

냉방이 잘 된 커다란 방, 벽 하나를 다 메운 어두운 색의 무거운 커튼, 티 테이블과 팔걸이가 달린 두 개의 의자. 사이즈가 큰 2인용 침대와 나의 심장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베개, 작은 냉장고와 옷을 걸도록 되어 있는 좁다랗고 긴 갈색 장롱, 화장대와 티슈통과 휴지통, 그리고 남성용 쉐이브 로션의 향…… 이런 것이 우리 게임의 장소가 될 것인가. 마치 아픈 이빨에 한쪽 손바닥을 대고 치과 병원에 들어선 것 같았다. 내 마음에 회의와 한심스러운 슬픔이 차올랐다.

방안엔 여름 한낮의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창을 등진 채 가방을 테이블에 놓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래옷부터 벗기 시작했는데바지를 벗고 검정색의 트렁크 팬티를 벗어 화장대 위에 놓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흰색 여름 니트의 웃옷이 길어서 허벅지까지 덮인 상태였다. 그는 나의 무릎에 닿을 정도로 붙어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자신을 보아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 기분이었다.

―난 할 수 없어요.

―…….

―난 이런 일이 익숙치 못해요.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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