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36)

  • 입력 1998년 8월 28일 19시 36분


제2장 달의 잠행 ⑫

숲에서 내려오자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낚시도구를 챙기면서 그가 말했다.

―나와 게임을 해보지 않겠어요?

는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숲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낸 뒤라 그런지 우리 사이엔 일종의 우정이 형성된 것 같았다. 그 역시 입을 다물고 내 눈 속만 쳐다보았다.

―당신 눈은 아직 햇볕과 공기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닳지 않았어. 마치 어둡고 차가운 숲의 그늘 속에 숨어 있다가 이제 막 나온 것 같아요. 송진 냄새가 나는 눈.

―무슨 게임이죠? 구름 모자 벗기 게임.

―구름 모자 벗기 게임? 특이한 이름이군요. 무슨 뜻이죠?

―혼자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질 때엔 분명했는데, 지금은 나도 모호해요.

―어떻게 하는 거죠?

―서로를 허용해요. 그러나 둘 중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게임은 끝납니다. 게임이 끝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그런 게임을 왜 하죠?

―글쎄. 우선 사는 게 지리멸렬하고,그리고 당신이 마음에 들고…. 그러나 사랑한다는 따위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질색이니까.

―당신은 이 게임을 자주 하나요?

―흥미를 끄는 낯선 여자가 나타나면… 자주는 아니고 이따금.

―왜 사랑해서는 안되죠?

―얽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언제나 사랑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에 시비를 겁니다. 삶을 위협해요. 특히 여자들이란 사랑을 가지고 한몫 보려고 합니다. 팔자라도 바꾸려고 들죠. 사랑한다면서 왜 저렇게 하지 않죠?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줘요. 이런 걸 사줘요. 왜 전화하지 않았죠?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난 당신 여자예요. 이제 어쩔거죠? 함께 살고 싶어요…. 여자들 그러는 거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그게 사랑인 걸요. 이런 식이죠. 먼저 사랑을 고백해야 해요.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일치해야 하죠. 그리고 심지어는 결혼을 약속해야 하구요. 그 거래가 성사되고 나면 모든 것을, 말하자면 육체를 서로 허용하죠. 이 게임은 모든 것을 뒤집는군요. 마치 보험에 들지 않고 차를 몰고 다니는 것 같이…. 고독하진 않나요? 당신은 고독해 보여요.

―그건 지불할만한 댓가요. 난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벌어 먹이느라 늙고 지쳐가는 소시민적인 삶보다는 수상쩍고 고독하고 홀가분한 단독자의 삶을 택했어요. 그 편이 나에게 쉬우니까.

―게임에선 늘 이겼나요? 이 게임에서는 아무도 이기지 않아요. 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진적도 있었나요?

―언젠가 한 번. 처음 이 게임을 했을 때. 녹색 모자를 쓴 한 여자가 나에게 게임을 신청했었지. 난 그녀에게 졌어요. 나중엔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지요. 남편과 이혼하고 나와 살자고 사정하고, 이 모든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고 도망가자고 공갈하고…. 거의 일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어요. 그녀는 끝까지 냉정했습니다. 마지막에 난 저자거리에 널린 그저 그런 파렴치한 치한이 되어버렸어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은 연인을 순식간에 치한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리고 내 인생도 바뀌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그 후론 단 한번도 지지 않았어요. 어때요? 당신도 꽤나 지루해 보이는데.

모든게 장난 같았다. 아무튼 재미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뭐, 생각해보죠.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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