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정원/대통령 문화가 없다

  • 입력 1998년 6월 27일 19시 32분


전직 대통령들이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 취임식에 한꺼번에 나타나 국민에게 갖가지 감회를 안겨준 전직 대통령들이 각자의 스타일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일반 국민도 사찰이나 결혼식장 투표현장에서 심심찮게 이들과 마주치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전직 대통령을 대하는 국민의 마음은 존경심과 반가움보다는 불안감과 어색함이 많다. 양측의 이러한 ‘마음의 거리’는 대통령 제도는 살아있지만 대통령 문화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임기후 활동 더욱 중요▼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대통령 문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취임식을 치르고 집권하는 동안에 보여주는 ‘대통령 집권기 문화’가 있다. 재임중에 실시하는 주요 정책, 업무 스타일, 대통령이 남긴 명언 등이 중심이 된다. 부수적으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행 스캔들이나 박정희(朴正熙)대통령시절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의 우아한 한복 차림과 같이 대통령과 영부인이 지닌 다양한 이미지나 사건들도 집권기 문화에 포함된다.

두번째로 이임식을 마치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전직 대통령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행보는 ‘대통령 임기후 문화’에 해당된다.

한때는 국가의 최고 어른이었던 이들이 행하는 봉사 자선 연구활동과 민간외교 정책자문 등이 근간을 이룬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그간의 정치적 상황과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감옥에 가거나 은둔함으로써 임기후 문화를 꽃피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임기후 문화는 국민과 대통령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대통령 문화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백악관을 떠난 전직 대통령들이 출신지나 정치적 고향으로 돌아가 임기후 활동을 활발히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전직 대통령들은 자신의 기념 박물관을 건립하고 재임 전후의 모든 기록을 보관하는 것을 국가를 위한 일종의 의무이자 관례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기념 박물관과 부설 연구소에 인재들을 결집해 국가와 세계 평화를 위해 연구하고 헌신함으로써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

재임중에 국민의 신망을 얻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던 전직 대통령들도 성공적인 퇴임후 문화를 일구어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곤 한다. 임기후 문화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카터센터를 이끌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카터는 남부 조지아주 주지사 출신으로 워싱턴 중앙정치무대의 경험이 없었다. 극심한 경기침체와 인질사태까지 겹쳐 한마디로 시련의 집권기를 보냈다. 선거 당시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사건등에 염증을 느껴 도덕과 정직을 강조했던 카터를 선출했다. 그러나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사태 수습에 머물곤 하는 평범한 대통령에게 곧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카터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봉사와 자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극빈 가정에 집 지어 주기 운동, 각종 인권운동, 기아구제운동 등을 벌였다. 또 한반도와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나는 각종 분쟁의 해결사로 맹활약했다.

로절린 카터 여사의 활동도 이에 못지 않았다. 그는 각국의 국가원수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걸어 해당국가의 인권 피해자들을 구제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인권상을 제정하고 이에 전념한 결과 수백명을 석방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카터센터의 영향력이 여기에 이르자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던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스스로 백악관과 카터 사저에 직통전화를 개설하고 자문했다고 한다.

카터 대통령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들의 임기후 활동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대통령을 단지 정치가나 집권자가 아닌 미국을 대표하는 일등시민으로 생각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몸 낮추고 국가에 봉사▼

이제 우리도 제15대 대통령시대를 맞았다. 현존하는 전직대통령도 4명이나 된다. 더군다나 국가가 치명적인 경제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사람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마다 국정이 항상 제로선상에 선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간의 역사적 질곡이나 정치불안을 단번에 걷어 낼 수는 없겠지만,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한국의 대통령문화는 건전하게 거듭나야 한다. 잠시 군림했다가 영원히 외면받는 대통령이 아니라 사심없이 국가에 헌신해 오래도록 사랑받는 대통령상이 하루속히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김정원〈세종대 정보통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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