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구칼럼]내일이 있는 축구

  • 입력 1998년 6월 19일 19시 42분


지난 일요일 한국과 멕시코 축구전은 살맛을 잃게 했다. 져도 그렇게 허무하게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우리가 이겼다면 지금쯤 엄청난 축구붐이 일었을 것이다. 매일 새벽 축구시청하느라 붉은 토끼눈이 다 된 사람들로 직장일에 다소 지장을 준다 해도 무슨 대순가.

그러나 그날 새벽의 졸전은 집단우울증만 악화시켜 놓았다. 차라리 밤잠 설칠 일이 없어져 속 편하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대표팀이 장도에 오르기 바로 전날 중국팀과 가진 친선경기만 해도 너무 그렇게 힘을 쏟을 게 아니었다.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면 족했다.

▼형평성 문제있는 판정▼

그동안 닦은 기량을 국민 앞에 한껏 뽐내고 싶은 욕심이 앞섰는지 모르나 그 바람에 공격의 핵(核)인 황선홍선수의 부상으로 큰 전력손실을 입었고 이는 멕시코전의 패인 중 하나로 이어졌다.

프랑스월드컵 초반을 결산하면 선취골을 넣은 팀의 80%가 승리를 안았다.

우리는 전반 27분 하석주의 총알같은 프리킥으로 선취골을 넣고도 그것을 지키지 못해 결국 천금같은 1승의 기회를 놓쳤다.

물론 하석주의 백태클은 무모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반칙에 누적경고 없는 하석주에게 즉각 퇴장을 명한 오스트리아인 주심 베코의 처사도 황당하고 야속하기 짝이 없다.

선수보호를 위해 이번 월드컵부터 지나친 백태클은 경고없이 퇴장명령키로 규정이 바뀐 사실을 하석주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취골의 감격에 겨운 하석주로서는 순간적으로 깜박했는지 모른다.

또 그 정도의 백태클은 국내경기에서는 늘 해오던 일이다. 오히려 과감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기준만 생각하고 달라진 국제기준을 도외시한 결과는 엄청났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눈앞에 레드카드였다. 언필칭 국제화를 외치면서 우물안 기준에 안주하다 하루아침에 IMF위기를 맞은 우리경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용서받지 못할 반칙이라면 징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누가 봐도 하석주의 반칙에는 고의성이 없었다. 비신사적 행위라는 판정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점은 며칠 전 일본의 NHK 심야방송이 잘 지적하고 있다.

잉글랜드와 튀니지전에서 속출한 백태클과 하석주의 경우를 슬로비디오로 비교분석하면서 베코주심의 기준대로라면 최소한 6명은 퇴장감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경기를 맡은 일본인 오카다주심은 단 한명도 퇴장시키지 않았다고 해설했다. 베코 오카다 두 주심 어느쪽의 기준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형평성에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청천벽력같은 하석주의 퇴장과 더불어 게임의 승패는 이미 결판났다. 남은 10명으로 전반전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후반전 들어 전력이 급속히 떨어지자 기고만장한 멕시코팀은 총체적 부실로 지리멸렬 우왕좌왕하는 한국 문전을 마음껏 유린했다.

무너져도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다니 속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석주퇴장이라는 위기상황을 맞았으면 위기극복을 위한 투지와 정신력이 더욱 촉발될 법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여기서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내일 일요일 새벽, 한국팀은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어 강호 네덜란드와 중요한 일전을 갖는다.

바라기로는 지난번같은 졸전으로 국민을 또다시 실망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궁지의 차범근감독은 비기기작전을 생각하는 모양이나 맞지 않다. 네덜란드와 비긴다고 벨기에를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남은 두 경기 모두 건곤일척, 필승의 결의로 덤벼들어야 한다. 그러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장렬하게 지는 멋진 패배로 박수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축구에 내일이 있다.

▼필승의 결의로 나서야▼

우리가 상대할 두 팀은 객관적으로 우리보다 실력이 앞서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축구다.

최선을 다해 싸우다 보면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지더라도 최선을 다한 연후의 패배라면 치욕이 아니다. 부끄러울 게 없다. 지난번 멕시코전은 아깝게 놓친 게임이기도 하지만 멋있게 지지도 못했다.

바로 그 점이 국민을 더욱 화나게 만든 것이다. 역부족으로 승부엔 질 경우라도 투혼과 스포츠맨십에서는 결코 지지 말기 바란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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