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印尼국민의 저력

  • 입력 1998년 5월 25일 19시 28분


13일 서울을 떠나 자카르타로 향하면서 ‘설마 32년 독재자 수하르토가 물러나지는 않겠지. 많은 피를 불러오고 독재자가 다시 승리할 거야’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14일 자카르타 곳곳의 폭동현장을 대하며 느껴진 열기에다 판자촌, 헐벗은 아이들, 거리를 헤매는 부랑 청소년들, 직업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는 수많은 시민을 보고나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특히 부촌인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의 화교 소유 고층빌딩군에서 느껴지는 빈부차를 보고는 ‘단순한 경제불만 독재불만이 아니다’는 인식이 들게 됐다.

폭동을 피해 호텔에 투숙한 한 화교는 자카르타 시민 평균 월소득의 3배인 미화 1백달러를 매일 쓴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서민들의 정치적 분노가 수하르토를 향해 터졌다면 경제적 분노는 경제를 좌우해온 화교들의 차이나타운을 향해 터졌다”는 말이 실감났다.

14일 밤의 방화로 5백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족자백화점과 쇼핑몰에서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탄 채 80㎝ 크기로 오그라든 시체들을 보고는 ‘폭동이 일어나도 한참 늦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통령 일가가 1천여개의 기업에 관여하면서 4백억달러의 재산을 가진 반면 이슬람계 유명지도자는 차 한대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학생들을 지도해 온 나라.

32년 장기독재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공세마저도 알라신의 뜻으로, 운명으로 치부하고 참고지내는가 하면 20일 ‘국민각성일’에 예정됐던 대규모 시위를 취소하자는 재야 지도자에게 어느 누구도 ‘겁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들의 나라.

이들이 거둔 소중한 시민혁명의 승리는 세기말의 이 순간 ‘그래도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간명한 진리를 깨닫게 했다.

김승련<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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