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살릴 기업과 죽일 기업

  • 입력 1998년 5월 12일 19시 24분


정부와 은행권이 이달 말을 시한으로 본격적인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다. 우선 대기업을 정상 회생가능 회생불능의 세 부류로 나눠 재기할 수 없는 기업에는 여신을 중단해 과감하게 퇴출시키겠다는 것이 당국의 입장이다.

당초 정부는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율조정을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으로 삼았지만 수개월에 걸친 독촉에도 대기업들은 부실기업 정리에 적극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회생가망이 없는 기업에 은행빚만 쌓였고 급기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최근 우리 은행들의 신용도를 다시 큰 폭으로 하향조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번에 정부가 직접 칼자루를 쥐고 나선 것은 당연하다. 부실기업의 조기퇴출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하에 있는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한 가장 긴요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실기업정리가 불러올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몇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시한상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은행에 따라서는 최대 50개가 넘는 대기업을 심사하는 데 주어진 기간이 2주일여에 불과한 곳도 있다. 현실적으로 정밀검토가 어렵다는 말이 은행관계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신속하게 처리하되 서두르다가 억울한 판정을 받는 기업이 생기지 않도록 은행별로 시한에 융통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둘째, 부실판정이 얼마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당국은 일정 기준을 근거로 판단토록 한다지만 이 가운데는 경영인에 대한 평가라든지 노사분규 여부 등 수치화할 수 없는 부분들도 상당히 있다. 주관이 개입될 경우 형평성 측면에서 두고두고 잡음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평가기준이 좀 더 엄정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평가의 독립성 확보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은행의 판단에 따라 기업의 사활이 결정되는만큼 부실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은행과 정치권을 대상으로 필사적인 구명운동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평가담당자가 이들의 로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에 구조조정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실기업을 선별하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해도 이들 기업을 완전히 정리하기까지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은행이 안게 될 엄청난 규모의 부실채권 문제나 퇴출대상 기업에 대해 부당한 여신이 집행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방안 등 정밀한 후속조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과감한 구조조정은 현 경제난국을 풀어 나가기 위한 절대적 명제다. 부실기업 정리마저 부실화하면 더 큰일이다. 정부와 은행권의 책임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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