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학준/北아일랜드 평화협상이 주는 교훈

  • 입력 1998년 4월 13일 19시 40분


최근 영국과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아일랜드와 한반도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한반도가 이웃 제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로 합병됐듯 아일랜드 역시 이웃 제국주의 영국에 식민지로 합병됐고 한반도에서 1919년에 거족적 무력 독립투쟁이 시작됐듯 아일랜드에서도 이 해에 거족적 무력 독립투쟁이 시작됐다. 2차 대전 종전 직후 제국주의가 퇴조하던 시점에 한반도가 해방됐듯 아일랜드도 해방됐다. 한반도를 ‘동양의 아일랜드’라 부르고 아일랜드를 ‘서양의 코리아’라고 부른 까닭이 거기에 있다.

▼ 한반도와 근대사 닮은 꼴 ▼

한반도가 해방되면서 남북으로 분단됐듯 아일랜드도 해방되면서 남북으로 분단됐다. 아일랜드의 경우 북부는 영국령으로 남고 남부가 에이레공화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그러자 북아일랜드는 대영(對英)무력투쟁단체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을 중심으로 영국에 맞섰고 유혈사태는 계속됐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가르침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된다. 어느 한쪽이 다른쪽에 무력으로 강제한 통합은 반드시 유혈사태를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교정치학 용어로는 ‘강제된 통합’은 ‘내쟁형 통합’으로 이어져 통합의 가치를 사실상 무효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이 ‘내쟁형 통합’아래 희생됐던가. 영국이 IRA를 뿌리뽑겠다며 북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한 72년 이후만 따져도 양측에서 약 3천4백명의 희생자를 냈다. 북아일랜드 인구가 약 1백60만명에 지나지 않음을 고려할 때 희생자의 수가 엄청나게 컸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통합이 ‘강제된 통합’이요, ‘내쟁형 통합’이었다면 서독과 동독의 통합은 ‘자발적 통합’이요, ‘합류형 통합’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동서독 통일을 놓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다고 말하나, 사실은 동독사람들이 서독을 부러워해 서독에 자발적으로 합류해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기에 통일 7년6개월이 넘도록 통일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저지른 유혈사건은 한건도 보고되지 않고 있다. 통합이 유혈사태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발생시키는 것임을 독일 통일은 입증한 셈이다.

다행히 북아일랜드와 영국사이에도 평화협정이 성사됐다. 영국은 북아일랜드에 대한 직접통치를 끝내고,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를 통합하겠다는 뜻을 포기하며, 북아일랜드를 영국과의 통합을 옹호하는 개신교 세력과 영국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가톨릭 세력이 자치적으로 공동 통치한다는 합의의 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협상에 미국의 전직 상원의원이 주도적 역할을 한 사실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이 합의틀만으로 북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 진정한 봄이 올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들이 더 남아 있다. 특히 북아일랜드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친영 개신교 세력이 경제와 군경 등을 쥐고 있어서 반목의 여지는 여전하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계속된 피의 분쟁에서 벗어나 공존의 길로 접어들었음은 확실하다.

남북한은 독일에서보다 북아일랜드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남북 모두는 ‘자신의 헤게모니(지배권)가 보장되는 조건 아래서만’ 통일을 하려는 이른바 ‘헤게모니적 통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에서처럼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자발적으로 합류해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예상하기 어렵지만 북아일랜드처럼 이제는 유혈 대결을 벗어나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할 만큼 세월도 흘렀고 국내외 조건도 익어가기 때문이다.

▼ 남북한도 「공존의 시대」로 ▼

마침 중국 베이징에서의 남북차관급회담이 조심스럽게나마 진전을 보이는 듯하다. 또 스웨덴 등 몇몇 서방국가들이 유엔개발계획(UNDP)을 통해 북한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운용방법을 교육시키겠다는 뜻을 밝힌 데 대해 북한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고무적인 변화의 흐름이다. 남쪽에 대한민국이 세워진 때로부터, 그리고 북쪽에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때로부터 50년이 흐른 올해, 한반도에서도 북아일랜드의 평화협상이 되풀이되기 바란다. 이제야말로 남북 모두에서 유능한 협상주도세력이 나와 주변국가들과의 협력 아래 ‘내쟁적 분단’을 우선 ‘공존적 분단’으로 바꿔놓아야 할 때다.

김학준<인천대총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