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형석/우리 모두 「작은 島山」이 되자

  • 입력 1998년 3월 9일 19시 49분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선생이 민족과 국권회복을 위해 살다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60년이 되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보니 지금은 생전의 선생을 직접 뵈온 이들도 별로 없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 병으로 가석방중이던 선생을 이틀 동안 뵈올 수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고마운 일로 회상하곤 한다.

내 고향 대동군 송산리에는 고등농민학교가 있었다. 민족의식과 농촌봉사를 위해 선배 유지들이 세운 전문대학 수준의 작은 학교였다.

▼ 민족의식 일깨워

필요한 농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곳을 방문차 오셨던 선생이 하룻밤을 삼촌 집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삼촌이 일부러 집에까지 찾아와 부친에게 “오후에 도산선생이 동네분들에게 강연하는 시간이 있는데 형님도 오시지요. 형석이도 데리고 오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선생은 그날 오후에 동네 유지들에게 긴 강연을 해주었고 다음날 낮에는 주변 마을에서 모여오는 교인들에게 설교 겸 강연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선생은 계속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인 강연은 금지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일제때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였고 공산 치하에서 반공운동으로 순교를 당한 분이었기 때문에 교회 강연회를 감행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선생의 마지막 강연이 되었을 것이다. 곧 재수감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평소에 흠모하고 있었고 나의 기억력도 좋았던 때였으므로 지금도 그 강연의 장면들과 내용을 생생히 되새겨보곤 한다. 선생은 열번 다시 태어나도 겨레와 나라를 위해 살 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을 정도로 민족애의 화신같은 정열과 신념을 갖고 있었다.

20∼30명이 모인 학교 교무실에서나 3백∼4백명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교우들에게 똑 같은 정성과 열정을 쏟아부으며 호소하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를 정도였다.

지금은 독립을 했고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했다고 해도 그분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회를 위해 애태웠을 것이며 서로 믿고 살면서 사랑으로 협력하며 봉사할 수 있는 겨레가 되도록 계속해서 민족성 순화에 헌신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도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합니다. 싸움과 분열은 없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주는 일이며 진실한 사랑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원동력입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당시에도 나는 폭력보다는 정신적 독립운동이 앞서야 하며 우리 민족을 위한 최대의 과제는 교육을 보편화하고 인재를 키우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강연을 끝내고 마을을 떠나가던 선생은 한 아담한 기와집을 보시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저만한 집에 살려면 몇평 정도의 농사를 지어야 하며 식구는 얼마이며 가축은 어떻게 키우느냐고 상세히 물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모든 농촌 사람들이 저만큼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소원어린 말씀이었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일 정도로 모두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 겨레에 바친 한평생

마을 끝까지 어른들이 배웅을 하고 돌아섰을 때 한 장로가 “저 어른이 오래 사셔서 많은 국민에게 좋은 말씀과 뜻을 전해주셔야 될텐데…”라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은 심정이었다. 얼마 후였다.

나는 중학생복을 입은 채 친구들과 평양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신문 호외를 본 사람들이 도산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 모두가 작은 도산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1938년3월10일의 일이다.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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