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주영/「어둠의 터널」을 손잡고 가자

  • 입력 1998년 2월 25일 19시 56분


개화의 계절 4월의 날씨를 방불케 하는 따가운 햇살 탓일까. 지난 밤을 고뇌와 불면으로 지새운 까닭일까. 근대정치사상 처음으로 전라도 출신인 김대중대통령의 얼굴은 오늘 따라 피곤해 보인다. 취임식장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물리적인 모습은 패기와 주먹질의 제스처에다 호소력의 무게를 실은 연설이었다기보다는 침잠과 고뇌의 흔적이 보다 뚜렷하다. ▼ 어깨 무거운 리더의 고뇌 ▼ 그 연설에선 다시 한번 우리들 경제현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모멸과 거북함을 제시한다. 전진과 후퇴의 기로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당혹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처럼 확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추상적으로만 회자되고 있던 낭패라는 말에 구체성을 제시한다. 그랬기 때문에 김대중대통령은 취임식이 있기 전부터 실질적인 대통령의 업무를 감당해 왔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이 감당해야 할 고뇌의 무게는 더욱 가중되고 말았다. 웃음이 없었던 취임연설에서 그 고뇌의 흔적을 발견하고 착잡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름하여 수평적 정권교체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인 김대중씨에게 우리가 가졌던 진단의 잣대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으로 경도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김대중대통령은 지각을 한 대통령이 되었다. 이 지각한 대통령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이렇게 많은 것도 우리 정치사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분을 지지하지 않았던 60%에 가까운 선거권자들이 엉거주춤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취임식은 더욱 착잡하다. 그래서 대통령이 통치하려는 정부는 국민의 정부로 이름지었다. 그러한 발언에는 그분이 평소에 가졌던 철학과 인생관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르지 않겠다는 자제력과 의지의 표현이 엿보인다. 우리는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오늘 우리가 당면한 경제위기의 근원적인 정체를 확인하여 노출시켜 주었다는 것을 주목한다. 위기의 원인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면 그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그 문제 안에 잠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취임사에는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과연 그렇다. 그 말씀 이전에 우리는 이미 모욕적인 경제파탄이 부른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갇혀버렸다. 거리의 차량통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아파트의 불빛은 켜진 듯 꺼진 듯 흐려지고 서민들의 생활터전인 시골장터의 활기도 빛을 잃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하루 내내 애매하고 우울하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우리는 그동안 정체불명의 1만달러소득이란 구호에 너무나 들떠 있었고 경제생활이란 단어가 갖는 위험성에 소홀히 대처했다. 김포공항은 날마다 해외로 관광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로 북적거렸고 동남아의 관광지는 한국인여행자들로 범벅이 되었을 만큼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몰랐다. ▼ 과거잘못 탓할 겨를 없어 ▼ 조용히, 제발 조용히 그러나 꿈과 뜻을 가지고 이 살얼음판 위를 손잡고 걷자고 대통령은 호소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이 시점에서 가다듬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가졌던 들뜬 모습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지난 대통령과 정책을 추진했던 관료들을 탓하고 있을 겨를도 염치도 우리 모두에겐 없다.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만들고 정경유착 관치금융 부정부패는 이제 없다는 약속과 선언에서 보듯이 폐정(廢井)에 고인 물을 말끔히 퍼내고 새물을 가득 채울 날을 함께 지켜보며 그와 함께 걸어가야 한다. 전통 취주악대의 행진에서 겨우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대통령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김주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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