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학순할머니의 죽음과 일본정부의 뻔뻔함

  • 입력 1997년 12월 17일 20시 49분


▼『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끝났습니다.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할 부끄러운 인생이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 입니다』 91년 8월 자신이 일제 정신대 피해자임을 처음으로 고백했던 김학순(金學順)할머니가 남긴 말이다. 그 김할머니가 한을 풀지 못한채 16일 73세로 타계했다. 순결한 꽃잎이 일제에 짓밟힌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종군 위안부 생활 3개월만에 남편을 만나 탈출, 두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일찍 잃고 혼자 판잣집 생활을 해왔던 김할머니다. 그는 임종 직전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평생 모은 1천7백만원과 자신의 장례비 2백만원을 내놓았다. 스스로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나 많은 죄를 지었다고 했지만 속세의 신세를 모두 갚고 떠나는 마음이 눈물겹다. 자신의 상처를 끝없이 안으로만 다스린 김할머니는 시대의 희생자였다 ▼그가 91년 12월 도쿄(東京)지방재판소에서 연방 눈물을 닦으며 증언하던 모습이 더욱 생생하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 사람은 이런 체험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가슴이 아프지만 얘기합니다… 내 청춘을 돌려 주십시오』 김할머니는 95년 11월 「노을에 와서 노을에 서다」라는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기 위한 한풀이 무대였다. 김할머니의 절규를 잊어서는 안된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당국의 태도는 숱한 피해자들에게 꽃다운 시절의 상처 못지 않은 고통을 주며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다. 캄보디아의 훈할머니가 아련한 고향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많은 귀향을 해도 일본정부는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고 있다. 김할머니의 한많은 죽음이 일본 정부의 양심을 조금이라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