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건희 삼성회장]『위기를 경제체질강화 계기로』

  • 입력 1997년 12월 6일 20시 48분


―거대 기업군을 이끄는 바쁜 경영활동 가운데 에세이집을 펴내신 데 대해 경제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에세이의 기초가 된 현장메모는 언제 어떻게 하셨고 또 책을 펴내겠다는 생각을 왜 하시게 됐는지요. 『메모광(狂)이었던 선친의 영향을 받아 늘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지난 3월 동아일보로 부터 21세기 변화에 대한 내용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참 망설였습니다. 주위의 권유가 있었고 21세기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 사람들과 같이 나눠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고도 하고 책을 쓰게 됐습니다』 이회장은 10년간 경영현장에서 절감했던 생각들을 이 책 한권에 담으려고 무척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에세이집은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총 50회에 걸쳐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던 글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질문의 초점이 위기에 처한 우리 경제로 옮겨졌다. 호황기를 과잉투자로 허송한 뒤 외환위기에서 시작해 잇따른 정책실기(失機)끝에 IMF구제금융까지 받게 된 한국경제에 대해 이회장은 「경제주권 일부를 IMF에 저당잡힌 셈」이라고 표현했다. ―오늘의 이 경제위기는 어디에서 비롯했다고 보며 회복을 위해 어떠한 처방을 내시겠습니까. 『정책실패, 외교미숙, 국제통화 흐름에 대한 무지, 경제실상에 대한 홍보미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오늘의 위기가 비롯했다고 봅니다. 정부 기업 근로자 등 각 경제주체의 분수를 넘는 제몫 찾기도 경제위기에 한몫을 했고요. 그렇지만 지나치게 비관하여 자신감마저 잃게 되는 정신적 패배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면서 자제하고 근검절약하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도 피할 수 없지요. 우리 경제의 기본 잠재력은 비교적 건실합니다. 오히려 지금의 경제위기가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경제적 가치관이 정립돼야 합니다. 이제는 경제를 관치논리 정치논리 여론논리의 족쇄로부터 해방해 기업들이 경제논리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외국인에게 제한없이 인수합병(M&A)을 허용하는 것도 은행과 기업의 경쟁력을 기르는 처방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경제 자유선언 또는 헌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며 자유시장경제원리를 주장했다. 그는 위기탈출 처방의 하나로 재계의 자율적인 구조조정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경제의 핏줄인 금융기관을 이번 기회에 구조조정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은행의 주인을 찾아주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겁니다. 또 정부부터 앞장서서 살림규모를 줄이고 대형 국책사업의 투자규모와 시기를 재조정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 스스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금융 세제상 지원도 강구해야 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되면 기업간의 사업구조 조정문제도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번 검토해볼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는 『IMF 구제금융 신청에 따라 우리 경제에는 구조조정의 회오리바람이 한차례 불어닥칠 것』이라고 말하고 『IMF 구제금융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경제구조를 튼튼히 하는 쓴약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의 구조조정 논의의 대상에 삼성자동차나 현대의 제철사업도 포함될 수 있습니까. 『현대는 남의 회사라서 잘 모릅니다. 삼성자동차는 자율적이거나 타율적인 면에서 국가를 위해서라면 투자를 늘리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또 삼성자동차가 흡수합병을 하거나 흡수합병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93년 제2의 창업을 주창하면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 때 그가 한 발언들은 사회적으로 신선한 충격파를 던졌다. 「마누라를 빼고는 모두 바꿔야 한다」면서 삼성그룹 임직원들을 독일 일본 등 선진국으로 데리고 다니며 「변화」와 「혁신」을 외쳤다. ―삼성그룹 회장 취임 10년째가 됩니다만 10년간의 경영 성적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합니까.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신경영선언 이후 삼성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 10년이 1백년으로 느껴집니다.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었지요. 며칠밤을 새우고 고민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들은 수성(守成)을 이뤘다고 말하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신경영선언 이후 조금 바뀐 게 있다면 질이 중요하다는데 눈을 뜬 것 정돕니다. 변화에 대한 공감대도 어느 정도 형성됐습니다만 스스로 알아서 하는 자율과 창의성은 아직 부족합니다』 결국 그는 아직까지 삼성직원들이 만족할 만큼 바뀌지 못했다고 보고 있었다. ―반도체와 자동차산업에 진출하는 과정, 결단의 순간들이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반도체의 경우 앞으로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보십니까. 『비메모리반도체에서도 초일류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이미 삼성은 이 분야에서 세계 10위권에 진입했습니다. 그동안 비메모리분야에 연구개발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한때 삼성이 기아자동차 인수기업으로 거론되면서 논란도 있었는데 삼성자동차는 어떻게 키울 계획입니까. 『질로써 차별화한다는 사업철학과 원칙을 세우고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전 임직원이 기초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로 자동차사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벤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동차산업이 생산량 기준으로는 세계 5위지만 아직 품질과 디자인면에서 많이 모자랍니다. 무엇보다도 성능과 안전성 등 철저한 품질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삼성이 최근 조직을 30% 축소한다고 했는데 감원하는 건 아닙니까. 『30%를 자르는 감원은 아니고 전배(轉配) 등으로 풀어갈 것입니다. 기업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좋은 인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조직 30% 축소」를 「조직효율 30% 향상」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비슷한 조직과 기능을 합쳐 의사결정 과정을 단축하는 스피드 경영을 실천하자는 것이지요. 축소분 30% 중 15%는 평소 방만한 경영을 한데 따른 것이며 나머지 15%는 IMF 구제금융에 따른 축소입니다』 ―『정치는 4류』라는 이른바 베이징(北京)발언이 한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행정 기업경영 등 여러 부문을 평가한다면 어떤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그동안 각 분야에서 미래지향적으로 고쳐가려는 움직임은 많았습니다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미흡하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점수를 매기라고 한다면 4년 전과 마찬가지로 후한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군요』 ―대통령선거가 곧 있습니다. 이 시대엔 어떤 대통령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도 확고한 21세기 비전과 철학을 갖춘 분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위기국면을 극복하고 21세기 초일류 국가로 진입하는 초석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정리〓이희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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