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1997년 12월3일의 國恥

  • 입력 1997년 12월 4일 19시 54분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총재가 3일 국제통화기금(IMF) 양해각서에 서명함으로써 사실상 대한민국의 경제주권은 일단 3년간 IMF로 넘어갔다.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분루를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치욕(恥辱)의 현장이었다. 경제가 신탁통치에 들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 전반이 IMF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굴욕적인 협정을 맺은 것이다. 이날 우리는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면 국민이 얼마만큼 비참해지는지를 목격했다. 협상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알려졌지만 막상 발표된 각서 전문을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국회는 IMF기준에 맞춰 세입과 세출을 짜맞추고 정부도 모든 정책을 이 틀 안에서 수립해야 한다. 심지어 국방 통일 문화정책까지 결과적으로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약이 가해진다. IMF는 국가를 대표해 국무위원이 서명한 각서로도 모자라 국회의장과 대선 후보들에게까지 서약을 요구하고 관철시켰다. 국제협약 관례를 무시한 IMF요구도 무례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경제를 벼랑끝으로 내몬 정부야 말로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IMF총재 말 한마디에 대통령주재 국무회의가 무산되는 수모도 당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도 책임은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백기(白旗)투항식 협상의 근인(近因)은 정부가 위기를 위기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2백억달러 가까운 외채상환이 임박한 가운데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협상력을 발휘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수개월 전부터 금융위기를 경고했으나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가장 큰 책임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실정(失政)에서 물어야 한다. 5년 전 대선 때 그는 한국병을 치유하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냉엄한 국제현실을 외면하고 무능과 독단으로 일관, 결국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한국경제는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번 대선에서만은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임창열(林昌烈)부총리는 국민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사죄의 말 한마디 없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렀다면 국정최고책임자가 국민 앞에 직접 나서서 머리숙여 사과할 일이 아닌가. 하다못해 6개월 전에만 정신을 차렸어도 오늘의 이런 수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란만 해도 지난 여름부터 한보 기아사태 해결과 위기극복 능력이 없는 강경식(姜慶植)부총리의 교체를 여러차례 촉구했었다. 재임기간 중 경제팀장을 7명이나 바꿔 소신있게 경제정책을 펼 수 없게 한 것도 문제였다. 경제를 모르면 사람을 잘 골라 맡겼어야 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비록 타율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지도층부터 대오각성하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IMF한파(寒波)를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경제 전반의 구조조정과 체질강화라는 IMF처방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런 수모를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미래는 암담하다. 각 경제주체가 용기와 인내심을 갖고 허리띠를 졸라매면 보란듯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1997년 12월3일의 치욕을 잊지 말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