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승민/부실기업 처리의 원칙

  • 입력 1997년 10월 1일 19시 55분


기아 처리가 혼미와 교착을 반복하는 가운데 이제 대기업 부실화로 나라 경제가 치르는 비용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시간을 허송하는 가운데 병드는 것은 기아라는 기업과 거래업체뿐만이 아니다. ▼ 혼미 거듭하는 기아사태 ▼ 시간의 막대한 기회비용, 금융의 부실 확산과 대외신인도 하락, 그리고 우리 경제시스템의 퇴보 등이 국민경제로선 뼈아프지 않을 수 없다. 기아부도유예의 77일 동안 해결된 것은 없고 시간적 손실과 금융의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부 종금사의 부실, 증시 침체에다 은행의 부실까지 감안하면 금융권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사실상의 부도를 부도가 아닌 것처럼 유예해 봤지만 결국 실체적 진실은 변한 게 없다. 현재 상황은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봐도 믿을 만한 사공이 없다는 리더십 부재의 문제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는 나라에서는 부실기업이 시장과 법에 따라 처리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은 금융기관의 역할이고, 금융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선진국 정부는 시장과 법에 부실기업 처리를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기업부실의 처리에 금융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고 당분간 이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과거처럼 밀실에서 부실기업을 처리하는 것은 그 폐해가 심각해서 도저히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은 우리도 시장과 법에 따라 부실을 처리해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이다. 현 상황으로 볼 때 기아사태가 하루 빨리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산업의 부실과 금융의 부실이 동전의 양면임을 인식할 때 부실기업의 처리방식엔 부실금융의 처리방식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예금자보호, 부실채권의 처리, 부실금융기관의 구조 개편 차원에서 금융부실의 처리모델이 없는 한 산업의 부실에 대해서만 시장과 법의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금융의 부실을 처리함에 있어서까지 정부가 시장과 법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우리 시장경제가 아직 힘에 부치고 제도도 허술하다. 따라서 금융의 부실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차원에서 정부가 금융에 대한 지원수단을 무기 삼아 금융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단순히 급한 불끄기 차원의 지원이 아니라 납세자 부담이라는 훌륭한 명분 하에 금융인들에게 부실의 책임을 묻고 정부 주도의 계획된 구조조정을 과감히 행동에 옮길 필요가 있다. ▼ 법과 시장원리에 맡겨야 ▼ 이같이 금융부실의 새로운 처리방식을 전제로 산업의 부실은 시장과 법의 냉혹한 처리에 맡기는 방안이 최선이며 하루 빨리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시장에서 부실기업이 팔릴 수 있다면 언제든지 거래가 성사되도록 정부는 경영권시장의 제도를 다듬고 인수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해야 하며 외국자본이라고 회피할 이유가 없다. 새로운 정부역할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또한 법정관리이든 화의이든 법이 정하는 대로 가되 정부가 할 일이 있다면 법의 비효율성을 조속히 제거하는 일이다. 시장과 법의 결론이 파산이라면 이를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산업의 부실과 금융의 부실에 대한 이원적 접근모델을 정립하고 정부는 과감 적극 투명한 부실기업 정리를 국민에게 제시함으로써 경제논리로 도전을 극복하고 시장경제로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세운 뒤 국가의 마지막 책임은 경쟁의 패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일 것이다. 유승민(KDI 연구위원·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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