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수산/이젠 희망의 약속을 듣고 싶다

  • 입력 1997년 7월 22일 08시 09분


안내방송 한마디 없이 1시간이 지나도 1차투표의 검표결과는 나오지 않고, 대의원들의 부채질도 지쳐간다. 땀이 그칠 새 없는 말 그대로의 찜통 더위 속에서 마셔댄 물 콜라 사이다에… 이미 내 속은 느글느글해진 상태. 한 나라의 집권당, 4백만 당원을 가진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뽑는 대회 운영, 그 수준이 이래야 하나. 한마디로 최첨단 미디어시대에 그 대회 운영수준은 석기시대처럼 보인다. 검표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면 컴퓨터 판독의 OMR 방식을 선택한 의미는 무엇인가. 어디 그뿐인가. 30분이면 끝난다던 검표가 1시간이 넘게 지연되고도 한마디 안내방송이 없다. 대의원들의 분노의 함성이 대회장을 덮는 것을 들으며 문득 떠오른 생각은 내 나라의 집권당이 행사를 치러내는 능력이 겨우 이것인가였다. 어쩌면 신한국당 대의원들은 오늘 그토록 많은 악수를 하고, 그토록 많은 박수만을 친 것이 아니다. 평생에 원없을 부채질을 하고 땀을 흘렸을 것이다. 화합, 승리, 정권재창출, 결과승복, 공정경선. 대회장에 가득한 이런 구호들이 신한국당의 고민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대회장에 내걸린 구호에는 어느 기업의 광고 문구를 흉내낸 것도 있었다. 「사랑해요 신한국당, 함께 가요 대선승리」. 이런 구호가 우리 정치의 연성(軟性)화일 수 없는 것처럼 흑색선전과 금품살포설까지 등장했던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적어도 밝힐 것은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은 물어야 하지 않을까. ▼ 생동감 넘친 「첫축제」 ▼ 1차투표까지는 순조로웠다. 투표를 마친 대의원들과 함께 도시락을 타 먹기 위해 나는 펜싱경기장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가슴을 써늘하게 하는 것 하나를 만나야 했다. 행사장 밖에 그것도 대회장과는 멀리 떨어진, 점심도시락을 먹으러 가는 펜싱 경기장 앞에서 조그만 책상을 벌여놓고 팔고 있던 책 한권이었다. 「최형우, 대룡(大龍)의 눈물」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보며 느끼는 신한국당 대의원들의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묻고 싶었다. 잠자리가 가득 날고 있는 올림픽공원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한동후보를 아까워하는 대의원들이 많았다. 패자를 보는 한국인 정서의 따뜻함은 저런 것이리라 싶었다. 1시 15분, 드디어 결과를 미리 안 이인제 지지자가 대의원석으로 공처럼 튀어오르며 손가락을 두 개 펴들어 2위를 알리자 대의원석에서 환호가 터지고 민관식 선거관리위원장이 노익장을 자랑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1차투표결과로 이회창 1위를 발표하자 장내는 완전축제분위기.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재검표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잠시 후 VIP실로 가는 복도에서 본 이한동후보는 거의 비장해 보였다. 그런 한쪽에서, 양복 윗도리를 어깨에 걸친 이수성후보가 담담한 얼굴로 느릿느릿 복도를 걸어나가며 만나는 대의원들에게 손을 건네고 있었다. ▼ 구호뿐 비전없어 ▼ 2시간이 넘는 지루함이 걷히고 드디어 결선투표 시간. 그런데 또 여기서 당헌당규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두 후보에게 10분씩의 연설을 듣기로 한 것. 연설이 약속된 시간이 되었지만 이인제후보와 반이회창 후보 연대 4인이 함께 대회장을 돌며 연설회장으로 올라올 줄을 모른다. 연설을 시작하라는 민위원장의 목소리가 우렁차지만 두 후보를 둘러싼 대의원들의 연호도 그칠 줄을 모른다. 축제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바라보자니까 민위원장도 두 후보를 단상으로 올라오라고 재촉하다가 웃고 만다. 그리고 치러진 결선투표, 영광은 이회창 후보의 어깨에 꽃을 얹었다. 그러나 나라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그것은 영광만이 아니다. 이후보의 수락연설에 깔려 있던 비장함에 그가 약속한 말의 무게를 믿고 싶다. 집권당 초유의 경선이라는 의미는 깊다. 그리고 그 성공에 박수를 보낸다. 특히 1만2천여 대의원들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 정치에 희망을 가져도 좋게 성숙된 것이었다. 어쩌면 이번 경선의 영예는 대의원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14시간이 넘는 길고 긴 하루를 대회장에서 보내고 어둠 가득한 대회장을 빠져나오며 나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다만 정권재창출이라는 구호뿐, 국민에게 「이제까지와는 달리」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써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것인지, 어떤 말도 글도 내 기억에 없었다. 후보선출은 했지만 그 많은 경선참여자들은 어떤 정책을 통하여, 국민에 대한 어떤 희망을 말했는가. 이 난국에 처한 나라를 어떻게 회생시키겠다는 그 무슨 약속이 있었던가. 지금 국민이 기다리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희망의 약속이다. 이제부터 신한국당이 넘어야 할 언덕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국민에게 줄 희망과 약속이라는 언덕이 기다리고 있다. 힘들고 험한, 그러나 넘지 않으면 안되는 질곡과 영광이 함께 할 언덕이. 한수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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