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지하/한총련 이쯤서 그만두라

  • 입력 1997년 6월 5일 20시 06분


이쯤해서 그만두는 게 어떤가. 꽃보다 더 아름다운 신록 속에서 작비(昨非)를 흔쾌히 인정하고 새 공부에 정진하는 게 어떠한가. 말썽 많은 한총련을 해체하고 각 대학은 자유로운 연대에 의해 다양하고 창조적인 네트워크 운동을 일으키는 게 어떠한가. 이미 연세대에 이어 20여개 대학이 과감하게 선택한 것이니 노선이라면 노선이다. 내용을 묻기 전에 이미 탈퇴 결정 소식만 듣고도 마음에 신선한 바람이 들락거린다. ▼ 끔찍한 죽임의 소식 ▼ 그동안 한총련의 행보를 지켜봤는데 스스로 자기들의 행동에 취해서 모든사람이박수를 보내고 훗날 역사가에 의해 칭송될 줄로 착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국민은 물론이거니와 북한당국마저도 학생들의 과격운동을 그리 크게 기대하거나 높게 평가하고 있지도않다. 코만도스 유격술에서 말하는 소모품 대접이 고작이다. 당연하다. 경제적으로 부담없고 정치적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여리고 변덕 많은 학생들을 그들이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逆)으로 과거의 기존 시스템들을 거부하며 자유로운 사상과 문화를 추구하는 창조력이 대학생들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그렇다. 몇십번을 고쳐 생각해보아도 역시 그렇다. 젊은이의 사상과 행동은 마치 6월의 저 싱그러운 신록과 같은 것이요, 해맑은 생명과 사랑의 찬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또 죽임의 소식이다. 사수대(死守隊)라는 말 자체부터가 죽임의 냄새로 가득한데 프락치를 잡는다고 구타와 고문을 해서 가난한 젊은이 한 사람을 죽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자필 진술서를 받았다 한다. 끔찍한 정보부의 지하실이 연상된다. 그 진술서.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진술서와 「나는 프락치다」라는 진술서가 다를 게 무엇인가. 전기고문 물고문이 사나운 쇠파이프 화염병과 다른 게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데모구경하던 한 할아버지 입에서 튀어나온 말 『저놈들이 정권 잡으면 사람 씨도 안남겠다』 어찌할 것인가. 학생들이 본디 그렇게 사나운 사람들인가. 억압 밑에서 저항을 제 인생으로 선택한 인간에게는 좋든 싫든 자존심이 유일한 자기 배경의 외로운 힘이다. 그래서 자존심은 괴팍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생 전사들은 자존심도 없다는 것인가. 북한의 심리적 선전선동의 코만도스를 자청하고 학교를 해방구로 착각하는 행동, 스스로 억압과 취조의 검은 밀실인간이 되어 자필진술서를 받아내면서 이것이 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북한의 노선대로 살면 해방의 찬란한 그날이 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행동들. 「주사(主思)의 창시자」는 이미 이쪽에 와 있는데 여전히 북쪽을 국궁배례하는 행태에서, 일말의 혁명가적 자존심도 없이 거짓으로 자기를 설득하는 모습에서, 칠칠치 못한,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 얼굴은 보일지언정 혁명가의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사회주의 50년에 식량문제 하나 해결 못한 북한을 따라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학생들의 쇠파이프와 화염병은 광기(狂氣)인가 소극(笑劇)인가. 아니면 진부한 인생을 잊자고 시작하는 유희(遊戱)인가. ▼ 아직도 「혁명타령」인가 ▼ 북한의 현실은 지금 심각하다. 발대식이니 진술서니 무기한 연기(延期)니 뭐니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틈이 없다. 북한 주민을 굶주림으로부터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한총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창조노선으로 행보를 과감히 바꿀 것인가, 어쩔 것인가. 남은 것은 진정한 용기다. 어쩌면 학생운동은 성년의례(成年儀禮)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키를 뒤집어쓰고 소금세례를 한번 과감하게 받을 각오를 하라. 해남은 내 고향과 다름없다. 내 어린 시절의 도주와 아픔이 깃들인 곳이다. 해남 출신의 한 가난한 노동자가 대학생들에게 맞아 죽었다. 개인적으로 말하더라도 이렇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웬 난데없는 귀족혁명이랑가』 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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