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399)

  • 입력 1997년 6월 1일 09시 31분


제8화 신바드의 모험 〈52〉 저녁 무렵이 되자 나는 궁전 뒤뜰로 나갔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왕은 처녀 한 사람과 공을 던지고 받고 하면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천진난만하게 공놀이를 하고 있었던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사이가 좋은 부녀지간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왕과 더불어 공놀이를 하고 있는 그 처녀를 보는 순간 내심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청순한 얼굴, 밝고 명랑한 표정, 날씬한 몸매, 경쾌하고도 발랄함,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는 그녀의 몸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도 절로 미소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때때로 그녀는 까르르 웃곤 했는데 그 웃음 소리가 얼마나 맑고 아름다웠던지 계곡에 흐르는 시냇물소리 같았습니다. 그 즐거운 웃음 소리에 감염되기라도 한 듯 왕 또한 연신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공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처녀가 공놀이를 하고 있는 궁전 뒤뜰에는 봄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날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궁전 뒤뜰에서 본 처녀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그녀의 웃음 소리가 귀에 쟁쟁거렸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왕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래, 이제 마음을 정했는가?』 왕은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한 왕 앞에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습니다. 『충성된 자의 임금님! 저는 무엇이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법관과 증인을 불러 그날로 당장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이미 사십 줄에 들어섰는데다가 한갓 외국인 나그네에 지나지 않았던 나한테 신부는 실로 과분했습니다. 이제 갓 스물의 그녀는 아쉬울 것 없는 부자의 무남독녀요, 유서 깊은 가문의 꽃이요, 뛰어나게 기품 있는 절세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처녀를 나의 배필로 정해주신 임금님의 총애가 새삼 감동스러워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임금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나는 절대로 이 나라를 떠나지않으리라. 임금님 곁에서 임금님의 수족이 되어 드리리라』 임금님께서 친딸처럼 아끼던 처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날밤 나는 신부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습니다. 신부의 잠옷을 벗길 때에도, 잠옷을 벗긴 뒤 침상으로 이끌 때에도, 침상에 누워 그녀의 이마와 뺨과 입술에 입맞출 때에도 나는 사뭇 스스로를 억제하려고 애썼습니다. 행여 내가 무례하게 대하여 어떤 조그마한 마음의 상처라도 입히게 된다면 그것은 곧 임금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와 같이 젊고 순진한, 남자의 손길이 한번도 닿은 적이 없는 처녀는 몹시 민감하여 사소한 것에도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미르쟌 왕국에서 한때 결혼 생활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리고 내 나이 이미 사십 줄에 들었지만, 그때까지도 나에게 있어 여자란 항상 알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글: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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