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 발견상황]『괴선박 급속 南進』레이더 포착

  • 입력 1997년 5월 13일 20시 33분


북한에서 온 「보트피플」, 해상탈북을 감행한 두가족 14명은 우선 관계기관들로 구성된 합동신문조의 신문을 받는다. 합동신문조는 이들에게서 무엇보다도 순수한 귀순의사와 동기 등을 파악한다. 이 탈북가족들의 귀순의사 등을 맨 처음 감지한 당국자는 백령도 근해 해상에서 이들을 첫 대면한 해군 부천함의 함장 徐三植(서삼식·38·해사36기)중령이다. 서중령은 13일 오전 국방부 기자실에서 북한판 보트피플을 처음 발견한 당시의 상황에 관해 일문일답을 가졌다. 서중령의 설명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다. 해상탈북자 가족을 태운 북한선박을 처음 발견한 것은 백령도의 해병 제6여단 전방탐지 감시소(전탐기지). 레이더 스코프를 주의깊게 들여다보던 유근복상병(21)의 눈에 이상선박의 움직임이 잡혔다. 백령도 북쪽 14.8㎞ 지점의 북방한계선(NLL)근처 공해상에서 조업중이던 30여척의 중국어선단에서 선박 한척이 시속 7.4㎞의 속도로 남하하는 모습이 포착된 것. 이때가 12일 오후3시경. 유상병은 즉각 이상선박의 움직임을 전탐기지장에게 보고, 20분 뒤 부근해역에서 초계작전중이던 부천함에 검색지시가 내려졌다. 당시 부천함은 이상선박에서 남쪽으로 33.3㎞ 떨어져 있었다. 부천함장 서중령은 상황발생 해역으로 전속항진을 명령, 오후 4시15분경 2㎞ 전방의 가시거리까지 접근했다. 망원경속으로 이상선박의 선미에 「요동어(遼東魚)3043」이란 중국선명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통상 보아오던 중국어선과 형태가 달랐다.중국어선은 선박 중앙에 조타실이 있고 조타실 위와 선수(船首)에 중국어선 표기가 있는게 통례였다. 그런데 눈앞의 선박은 배중앙에 긴 기둥이 세워져 있고 어선표기도 선미(船尾)에 있었다. 더구나 「이상선박」은 부천함이 접근하자 선수를 북으로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중국 밀입국 선박이거나 간첩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서중령의 뇌리를 스쳤다. 약 2백m 지점까지 부천함이 접근하자 선박이 다시 방향을 돌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부천함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본 것 같았다. 갑판위에 3명이 나와 흰 깃발과 북한의 인공기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외쳤다.배가 침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서중령은 우선 위급상황에서 구조해야겠다고 판단, 부천함을 그들이 탄 선박 가까이에 붙였다. 그러자 선장인듯한 사람이 『우리는 신의주에서 왔다. 살려달라』고 소리쳐 귀순자임을 직감했다. 선실에서 노인과 어린이들이 차례로 나왔다. 세어보니 모두 14명. 옷차림은 반팔 상의부터 두꺼운 외투나 운동복까지 다양했다. 배가 침수되는 상황인데다 파도가 높아 이들의 팔을 잡고 몸을 들어올려 부천함으로 옮겨 태웠다. 서중령은 이들이 귀순자임을 확인한 뒤 즉각 인천 해군 2함대 사령부에 음어로 상황을 보고했다. 2함대는 즉각 부천함에 인천항으로 들어오도록 지시한 뒤 인근해역의 다른 초계함을 상황해역으로 대신 투입시켰다. 이들이 타고온 선박은 해경함정을 통해 예인토록 했다. 탈북가족들은 부천함에 옮겨 타고도 의심을 풀지않았다. 밥과 라면을 주고 어린이들에게는 과자를 건넸으나 먹지 않았다. 부천함대원들이먼저 먹어본 다음 권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안선국 선장(48)의 노모 김동선씨(68)는 너무 허약해포도당 주사를 맞혔다. 이들을 침실로 안내한뒤 상사 등 대원들이 어린이들과 놀아주자 조금씩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안심한 것은 부천함에서 이들이 본 밤 9시 텔레비전 뉴스 때문이었다. 남한 해군함정이라고 해도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던 이들은 뉴스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남한에 온 것을 실감한 듯했다. 〈황유성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