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옥의 세상읽기]「가슴으로 쓰는 이력서」

  • 입력 1997년 3월 22일 08시 12분


프리랜서로 방송사에서 일을 하다보니 새로운 곳의 일을 할 때마다 「자필 이력서」를 쓰게 된다. 몇년도에 어느 학교를 다녔고 전공은 뭐였으며 방송 경력은 어떠한가. 대개 이런 것들을 쓰는데 그때마다 도대체 연도가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77년에 대학에 들어 갔으니까 졸업은 4학년을 마친 그 다음해 2월이겠구나 하면서 손가락을 꼽아 보기도 하고 기자생활하던 때가 결혼하던 해였지 하면서 연도를 기억해낸다. 15년 넘게 방송일을 했으니 그동안 거친 프로그램도 수십가지인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것들을 연도별로 예닐곱개 쓰다 보면 어느새 이력서 앞면이 꽉 찬다. 이러다 나도 모르게 한가지 버릇이 생겼다. 한줄 한줄 내 삶의 발자국을 써 가다가 옛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81년 KBS 제2라디오 「허참과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여기자 코너」를 담당했을 때는 방송이 뭔지도 잘모르면서 그저 내가 쓴 기사에 내가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줄줄이 써댔다. 82년 KBS 제2FM의 「팝스 다이얼」원고를 쓸 때는, 당시만 해도 팝 칼럼니스트가 생소했던 시절이라 외국의 팝 전문지들을 번역해서 마치 전문가처럼 원고를 쓰는 「용감한 무지」도 발휘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력서를 써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방송사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부랴부랴 한줄씩 써내려가는 나를 보고 집에서 살림하는 친구가 마냥 부러워하며 한마디했다. 『얘 넌 좋겠다. 지금도 이력서를 쓸 수 있으니까. 난 말야 학교 졸업하고 놀다가 시집 가서…. 도대체 하나도 쓸 게 없어』 그렇지만 난 그 친구한테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왜 쓸 거리가 없겠니.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소중한 사람 만나 결혼하고 예쁜 애들 낳고 살림살이 하나씩 장만하면서 가정 꾸리고 사는 거, 그거 만큼 괜찮은 이력서가 어디 있어』 다들 한바탕 웃었지만 누구나 「인생의 이력서」를 쓴다면 어느 누구든 아름다운 사랑과 잊지 못할 추억이 있을 터이다. 그것이 설사 직업과 관련이 없으면 어떤가. 태어나 좋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쓸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자랑스런 이력서인가. 참, 얼굴은 마음을 닮는다던가. 이력서에 들어가는 내 얼굴 사진도 이제부터는 내가 예쁘게 잘 만들어 가야겠다. 차명옥(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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