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전 강원도 철원 깊은 산골짜기 군부대 막사 밖에는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장작이 타들어가는 페치카 옆에는 병사 몇 사람과 소대장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병사들 중에 남편도 끼어있었는데, 육사출신의 소대장 권소위는 풍모와 위엄이 있어 모든 병사들이 좋아하는 장교였다고 한다. 소대장과 비슷한 나이인 남편은 권소위에게 군인의 길을 택한 동기를 물었고 권소위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군인이셨어요. 그때문인지 어머니도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군인이 되라고 하셨지요. 육사 입학원서를 쓸 때 아버지는 강력히 반대하셨지만 어머니의 강권에 육사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역시 아버지 말씀대로 1년간의 생도생활은 너무나 힘들었고 방학때 만난 대학생 친구들의 생활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지요. 방학이 끝나갈 무렵 복교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몇날을 고민한 끝에 부모님께 자퇴결심을 털어놓았어요. 그러나 육사 지원을 반대하시던 아버지가 뜻밖에 「남자가 한번 선택한 길을 번복한다는 것은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일패를 기록하는 셈이다. 특히 다른 일과 달리 육사 자퇴는 군대를 탈퇴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불같이 호령하셨어요. 하지만 육사를 권하셨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힘들면 재수하여 일반대학에 가도록 해라」고 하셨어요. 부모님의 의견이 처음과는 반대로 돼버렸죠.
그럭저럭 3학년이 되니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학교생활이 견딜만 해지더라구요. 1, 2학년 때 그토록 귀족처럼 우아하고 늠름해 보이던 4학년이 되고보니 괴로웠고 힘들었던 3년 세월이 쓴 보약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그제서야 어머니의 사랑은 정 그 자체요 아버지의 사랑은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습니다. 고난을 회피하려는 자식을 냉정하게 나무라신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진정한 군인으로 태어날 수 있었답니다』
쉬지 않고 내리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는 권소위의 눈빛엔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정이 어린 듯했다고 한다.
배경순(서울 양천구 신정동 대림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