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48)

  • 입력 1997년 2월 20일 18시 15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3〉 그런 그녀가 독립군과 처음 입을 맞추었던 건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세번째로 나간 서오릉에서였다. 어떤 일에나 분위기라는 것이 있고, 또 그럴 만한 마음의 준비라는 게 있게 마련인데, 그날 서오릉으로 나가기 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두사람에게 그럴 만한 분위기와 계기를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날 먼저 수업이 끝난 그녀는 이제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교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나무 그늘에서 잠시 후면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올 독립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면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도 없는, 그래서 조급할 것도 없는 그런 평온한 오후의 기다림이었다. 그의 수업이 몇 시에 끝날지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수업이 끝난 30분이 지나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 오늘은 무슨 다른 일이 있는가 보구나, 하고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전혀 언짢지 않은 마음으로 일어설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막 시계를 보고 났을 때 저쪽 주차장 쪽에서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나오더니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멈춰섰다. 처음엔 그냥 눈에 들어오는 정물 하나를 바라보듯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만약 멈춰서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면 그녀는 잠시 전 자기 앞을 지나간 자동차가 어떤 자동차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이쪽을 향해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키듯 반짝하고 멈춰선 다음에야 그녀는 그것이 학교 안에서 독립군의 오토바이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오토바이보다 더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문제의 그 외제 승용차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자동차의 주인에 대해 학교 안에 떠도는 이런저런 말들보다 저 무겁고도 날렵한 것이 바로 재규어란 말이지,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운전석의 문을 열고 내린 자동차의 주인이 나무 그늘 쪽을 향해 걸어올 때에도 그랬다. 있는 집 아들답게 남자의 얼굴도 자동차와 한쌍으로 어울릴 만큼 어딘가 귀티가 나 보였다. 우선은 자동차를 먼저 보고 난 다음의 느낌이기도 하겠지만, 그를 향해 떠도는 비난의 구할조차 어떤 부러움과 선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쨌든 그는 주목받는 인생이고 축복받은 인생일 것이었다. 그는 열쇠고리를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워 손 안에 쥐어들고 천천히 그녀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자기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추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에 그녀 혼자만 앉아 있었던 게 아니었다. <글: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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