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력과 「전화」

  • 입력 1997년 1월 27일 20시 35분


이 나라에서 세금내며 살아가려면 여간 강심장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리나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가 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부정부패사건이나 대형사고가 터지니 심장이 강하지 않고서는 매번 놀라고 분통이 터져 오래 살기도 어려울 것 같다. 어른들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취학 전에 제일 먼저 배우는 어휘가 「구속」』이라는 말이 있다. TV뉴스에서 거의 매일 듣고 보는 것이 「구속」 또는 「구속영장」이라는 단어이니 그럴만도 하다. ▼ 「한보 돈대기」 배후인물 ▼ 개정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파문에 이어 「한보의혹」으로 또다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한보의혹」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은행돈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한보에 쏟아 부어졌고 그 엄청난 부실대출이 통상 은행의 대출관행으로는 납득이 안되는 극히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는데서 비롯된다.이번 한보부실대출의 배후에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해주는 대목이다. 권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반응(리액션)으로 볼 수 있는 법이다. 권력은 주로 전화로 행사되는데 공무원이든 은행장이든 전화를 받는 사람이 지시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권력인 것이다. 과연 은행장들에게 『한보를 봐줘라』는 「권력의 전화」를 건 배후인물은 누구인가. 국민의 관심은 오직 여기에 쏠려 있다. 야당은 이번 사건의 배후인물로 「여당4인방」 「젊은 부통령」 등을 지목하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배후인물은 해당 은행장에게 직접 전화를 건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흔히 이런 일에는 「실력자」가 직접 나서지 않고 아랫사람을 「하수인」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이번 한보부실대출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진행됐었을까. 현재까지 드러난 여러 사실과 정황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능할 것이다. 배후인물인 권력자는 지연 또는 학연 등으로 일찍부터 한보와 선이 닿아 있었다. 「로비의 귀재」인 한보의 정태수총회장이 이를 이용하지 않을 리 없다. 어느 날 한보측은 이 권력자를 당진제철소 건설현장으로 안내, 사업내용을 브리핑한다. 이에 권력자는 큰 감명을 받는다. 90여만평의 부지위에 세워지고 있는 당진제철소는 사실 대단한 규모로 처음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하다. 그 후 이 권력자는 은행장에게 말이 먹혀들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당진제철소 대단하더라. 국가기간산업인데 좀 도와줘라』고 말한다. 권력자는 어쩌면 별생각 없이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그런 부탁을 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하수인이 전화를 걸고 이에따라 은행장이 움직인다. 추가대출은 이렇게 해서 이뤄진다. 대출을 받은 한보가 「사례」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은행장은 「위」로부터 전화도 받았겠다, 별 부담없이 커미션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약점이 돼 점점 부실대출에 빠져 든다. ▼ 문민정부 미래 달려 ▼ 이상은 그야말로 추론일 뿐이다. 진상은 앞으로 있을 검찰수사로 낱낱이 드러나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보의혹」의 진상규명 없이는 문민정부에도 미래는 없다는 점이다. 金 次 雄<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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