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외국의 경우

  • 입력 1997년 1월 20일 20시 13분


해외에 나가있는 한국 특파원들 사이에 농담삼아 오가는 실화가 있다. 『국내에서 93년 실명제가 발표되던 날, 모 특파원은 곤히 잠을 자다 본사 데스크의 다그치는 전화 목소리에 깨어났다. 빨리 당국자의 반응을 받아 마감시간에 대라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3시, 씩씩거리던 특파원이 날이 새기를 기다려 전화를 걸었더니 그들은 실명제가 뭐냐고 되묻고 그럼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느냐고 의아해 하더라는 것이다』 ▼ 객관화한 「우리의 문제」 ▼ 국내문제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나 사례가 모두 이처럼 어이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화의 정도가 심화되고 우리의 가치가 보편화될수록 저들의 반응을 거울삼아 우리의 모습을 되비쳐보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해외반응의 가장 큰 유용성은 우리의 문제를 객관화 단순화시켜준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이해관계나 정치적 선입관에서 사물을 보면 바로보기가 쉽지않다. 또 가까이서 난마처럼 얽힌 사태를 쫓다보면 본질이 무엇인지 깜빡할 때가 적지 않다. 노동법 개정과 파업에 대한 외국언론의 논조와 사례중에는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많다. 우선 현정권이 노동법 개정절차에서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회 날치기통과는 문민시대임을 강조해온 현정부가 구시대의 악습을 되풀이함으로써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다른 하나는 직장마다 명예퇴직으로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여있던 근로자들이 새노동법에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자 심적으로 대단히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해오던 근로자들이 방어적 심리에서 파업동조 세력에 합류했다. 노동운동이 선진국처럼 고임금에서 직업안정으로 비중이 바뀌고 있다는 17일자 뉴욕 타임스의 보도는 음미해 볼만하다. 선진국의 노동분쟁 사례를 살펴보면 숙연해진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산업이 급속히 발전, 근로자 계층이 다양해지면서 노동조합이 형성됐다. 당시 자본가들은 정치권력과 결탁, 노조활동을 탄압했다. 1877년 노조는 철도파업을 단행, 전산업을 마비시켰다. 연방정부는 군을 동원, 폭력적인 노조원들과 충돌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백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후 근로자들의 협조가 생산성을 높이는데 긴요하다는 각성속에 노동운동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와그너법(1935년)이 제정되었는가 하면 노조가 비대해지자 이를 규제하는 태프트―하틀리법(1947년)이 나오기도 했다. ▼ 「노동법 진통」줄여보자 ▼ 84∼85년 영국에서는 대처정부가 만 1년간의 사투끝에 광산노조의 파업을 물리친 후 노조를 약화시켰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노사 그리고 정부간에 억제와 투쟁을 반복하면서 오늘날의 균형과 평온을 이루어냈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역사가 발전한다면 참으로 암담한 일일 것이다. 남들이 겪은 고통, 희생을 피해가거나 건너뛸 수 없다면 그 진통의 시간이나 정도라도 단축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요체요, 인간의 가장 성숙된 정신단계라는 타협과 절충을 이루기에 우리는 아직도 역부족이란 말인가. 연 국 희<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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