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저무는 한해와 훈훈한 인정

  • 입력 1996년 12월 30일 20시 20분


▼1996년이 저문다. 역시 즐거움보다는 아쉬움이 많았던 한해다. 무엇보다 불황과 경기침체의 여파로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밀려난 「고개 숙인 남자」들의 한숨소리가 높았던 해다. 회사가 잘돼야 내가 잘된다는 믿음으로 가정보다 회사에 더 충실하던 직장인들이 평생직장으로 믿었던 일터에서 물러나 조기젓(조기퇴직) 명태젓(명예퇴직)따위 자조(自嘲)의 한을 되씹었다 ▼한총련사건 무장잠수함사건으로 국가안보가 시험대에 오르고 김경호씨일가 탈북사건, 중국동포 사기사건으로 민족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세기의 재판」과 구 조선총독부건물 철거로 「역사 바로세우기」의 장(章)이 채워졌다. 2002년 월드컵 한일공동개최 결정과 OECD가입으로 21세기를 향한 국가적 의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말의 파행국회는 한해를 온통 어두운 색깔로 칠해버렸다 ▼대중문화를 휩쓴 공주병신드롬 전생신드롬 애인신드롬 「빠떼루신드롬」 속에서 10대의 성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것도 잊을 수 없다. 연이은 고위공직자 구속과 막가파 아가동산 따위 우울한 이야기들이 신문지면을 메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도 정치권은 내년 대통령선거를 향한 저속한 말잔치와 낯뜨거운 대결로 일관했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냉소가 어느 해보다 높았던 것도 1996년이 남긴 기록의 하나다 ▼부끄러움 속에 한해를 그나마 위안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얼어붙은 사회를 녹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삯바느질로 모은 1억원을 심장병 어린이돕기에 내놓은 할머니, 곰탕장사로 모은 전재산 55억원을 대학에 내놓은 할머니, 여관을 하며 모은 11억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은 할머니같은 분들이 삶의 뜻을 되새기게 했다. 어두운 사회에 빛을 던지는 것은 역시 나눔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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