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泰山의 낮잠」

  • 입력 1996년 12월 23일 21시 00분


일본 오카야마(岡山)에는 하야시바라(林原)라는 조그만 연구소가 있다. 규모야 보잘 것이 없지만 항암제분야에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대단한 연구소다. 이 연구소 현관엔 이상한 액자가 하나 걸려있다. 내용은 「태산(泰山)의 오수(午睡)」라는 단 한 구절. 「태산의 낮잠」과 이 연구소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유래는 이렇다. 옛날 일본의 태산엔 괴짜 도승이 한 사람 있었다. 도를 열심히 닦는 것도 아니고 매일 하는 것이라곤 술에 취해 그늘에서 낮잠 자는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그 당시 일본 사회의 「난다 긴다」는 지도급 인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도승을 찾아왔다. 입신양명의 길을 찾고 세상이치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 톰슨社 인수 좌절 의미 ▼ 도승은 정말 신통했다. 산속에 누워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것이 없었고 앞일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더욱 몰려와 도승은 더 유명해졌다. 세상이라고는 한 발짝도 나가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사를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발로 찾아와 털어놓는 각종 이야기는 바로 그 당시의 최신 최고급 정보였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떨어뜨리고 가는 다양한 「정보」를 종합해보면 세상 돌아가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던 것이다. 연구소도 같은 이치다. 항암제분야에선 세계 최고 수준의 독보적 기술을 갖고 있으므로 미국 유럽의 일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온다. 공동 연구를 하다보면 머리속에 넣어온 독보적 기술들이 연구소에 저절로 떨어진다. 엄청난 기술축적의 덕택에 이 연구소가 더욱 유명해졌음을 태산의 도승에 비유한 것이다. 하야시바라 연구소 얘기는 내 기술이 있어야 남의 기술을 가질 수 있다는 기술세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얼마전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대우의 프랑스 톰슨전자 인수 좌절도 따지고 보면 그 바탕엔 기술세계의 미묘한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물론 프랑스 정부의 비열한 태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국가적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대우같은 한국기업에 프랑스의 상징 기업을 넘길 수 없다는 여론을 들먹이지만 한국을 얕잡아 보는 우월적 심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격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흥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분을 삭이고 우리가 왜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 기술, 돈으로 살수 없어 ▼ 우리 기업들은 최근 몇년사이 경제의 낙관론을 바탕으로 기술집약형 외국기업을 사들이는데 열을 올렸다. 삼성이 지난해 3억8천만달러에 인수한 세계6위권의 컴퓨터회사 AST사, 현대그룹이 인수한 미국의 AT&T GIS사가 바로 대표적인 회사다. LG가 57.7%의 지분확보를 통해 인수에 성공한 미국 전자업체 제니스사도 그중의 하나다. 모두가 쟁쟁한 기업이다. 기술도 얻고 브랜드의 인지도를 십분 활용하겠다는 것이 당초의 의도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나같이 고전하고 있다. 기술이전은 고사하고 엄청난 「월사금」만 계속 집어넣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기업들은 모자라는 기술은 돈으로 사면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제니스나 AST, AT&T GIS의 경험이 말해주듯 핵심기술은 결코 거저 오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전략적 제휴도 마찬가지다. 1대1의 관건은 기술수준이다. 한국하면 독창적 기술, 원천적 기술과 연결되는 세계적 이미지가 얼마큼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인 길<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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