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칼럼]버려진 탈북자들

  • 입력 1996년 12월 13일 19시 37분


김경호(金慶鎬) 최현실(崔賢實)씨 일가 등 17인의 북한탈출 44일 장정(長征)은 인간의 삶의 의지가 빚어낸 드라마였다. 그들은 서울땅을 밟고서야 비로소 생명을 뒤덮은 불안과 공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포공항에 내린 그 지친 얼굴에 번지는 수줍은 미소와 무한한 안도감은 길고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 17인의 목숨을 건 선택과 모험은 「서울 안착」으로 일단 보상받았다. 이제부터 그들이 맞을 낯선 새 인생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그들의 안도와 환호 뒤에 같은 탈북자이면서도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속에 산 설고 물선 이국땅을 정처없이 떠도는 비참한 동포들의 한숨이 있다는 사실에 눈돌리는 사람은 적다.서울에 오고싶어도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해외 유랑탈북자들의 분하고 딱한 처지다. ▼무국적 유랑자 신세▼ 지금 중국과 러시아에서 떠도는 탈북자가 대충 3천여명, 이들 중 한국 망명의사를 밝히고 있는 사람만 1천명이 넘는다는 보도다. 정부의 「선별 수용」정책에 배제당해 북한 체포조에 쫓기며 무국적자 신세로 유랑하는 그들에게는 떳떳하게 취업할 곳도, 마음놓고 잘 곳도 없다. 병들어 누워도 물 한모금 입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 탈북자는 크게 해외 파견근무나 유학중 북한조직을 이탈하는 경우, 한국 또는 제삼국을 목표로 북한땅이나 러시아 벌목장을 탈출하는 경우로 나뉜다. 그중 국내에 수용되는 경우는 주로 전자(前者), 유랑하는 경우는 주로 후자(後者)라는 인상이다. 결국 북한체제의 수혜자계급은 탈북 후에도 우리 정부가 보호하고 북한에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 탈출한 노동자 농민, 「성분불량」 계급은 우리 정부로부터도 버림받는다는 역설이다. 이 북한체제의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인도주의원칙에도 맞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윤리에도 맞지 않는다. 국내 수용 탈북자 보호정책에서도 지적되는 이러한 비형평성이 탈북자 수용을 선별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면자유와 민족의 이름이 부끄럽다. 수도권에 5백명 수용규모의 탈북자 보호시설을 짓겠다는 계획만 검소하게 수정해도 유랑 탈북자 전면수용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南北통합 매개역할▼ 국내 수용이 어렵다면 제삼국에 일정한 수용시설이나 자활시설을 마련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또 혹 탈북자들이 반갑지 않은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면 이것부터 바로잡는 것이 순서일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탈북자들이 통일로 가는 과정이나 통일 후의 남북한 사회 심리적 통합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전략적 사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국 북한 국경지대에 사는 중국 조선족들은 겨울이 오면 따로 쌀주머니 하나씩을 준비해 둔다고 한다. 북한을 탈출하는 동포들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이라도 지어 먹이겠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국내 수용 탈북자들의 재사회화(再社會化)도 급하고, 언제 닥칠지 모를 대탈북사태에 대한 통합대비도 급하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이 추운 겨울,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얼어붙은 두만강 압록강을 무작정 건널 탈북동포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통일을 민족적 감상(感傷)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는 옳다. 그러나 민족이 아니라면 통일을 말할 이유도 없다. 김 종 심<논설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