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치文化 바로세우기」

  • 입력 1996년 12월 1일 19시 53분


1996년이 저물어가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이 해도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정신없이 전개되는 사건 앞에서 지나간 역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할까. 그러나 사실은 1백년전 그때 4월7일에 한국 최초의 언론 「독립신문」이 창간됐고 7월2일에는 독립협회가 결성됐다는 것은 꼭 뜻깊게 회상했어야만 했다. ▼「독립협회 정신」의 교훈▼ 한국언론 1백년이라고 해서 「독립신문」은 다소 상기하는 듯했으나 독립협회와 그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민족사의 과거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더욱이 독립협회를 이 시대 이 시점에서 경건하게 회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역사란 「옛날 그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단다」라고 전하며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흥미거리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는 오늘의 시대속에서 재발견되는 것이며, 오늘의 우리를 역사의 현장속으로 내모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일제하에서는 3.1운동을 민족의 설화로 삼았고 민주화운동에서는 4.19를 되새겼다. 그리고 군사독재가 무력적인 탄압을 일삼게 되자 동학혁명이나 의병무장투쟁을 빛나는 역사로 이어가야 한다고 했었다. 한 시대는 그 시대를 위한 역사를 발견하고 설정한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어가야 하겠다고 다짐할 지난날의 역사란 어떤 것일까. 독립협회 1백년인 이 해에 선인들의 그 뜨거운 운동을 우리는 거의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놀라운 운동이었다. 19세기 말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문화였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모두가 조선왕조의 군왕에 대해서는 깊은 존왕심(尊王心)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깊숙이 궁중속에서 국왕 개인 또는 그를 둘러싼 신하들이 비밀리에 결정하는 국정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국민이 참가하는 공공의 마당에서 논의돼야 하며 국왕이상의 지상권(至上權)을 가진 국민의 판단, 말하자면 공론(公論)에 국왕이나 그 고위 신하들도 따라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론이라는 법정을 구성하는데 차별받아온 계층까지 참여하는, 정말로 계급이나 계층의 차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중이 공론과 공공성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필요로 하게 됐고 여기에 신문이 등장한 것이었다. 확실히 이것은 지난 날의 왕권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민주적인 사회관계라고 해야 한다. 거기서 형성되는 공론이란 어떤 정치적인 분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국왕도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고 「만민공동회」에는 대신들까지도 참석해야만 했다. 비록 독립협회가 2년반 정도의 짧은 기간밖에 계속될 수 없었다고 해도 그것은 폭력이나 혁명없이 찾아낸 빛나는 새로운 정치문화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했던 많은 선인들이 일제하에서 민족적이며 민주적인 저항을 이어갔던 것이 아닌가. ▼민주적 운영 되새겨야▼ 우리가 이 해에 이 운동을 의미깊게 되새기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사이에 역사에 대한 심한 망각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세계화니, 선진국 진입이니,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니 하며 장미빛 꿈을 그리면서 민족의 역사는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일까. 내년 대통령선거에서도 모든 후보가 역시 그처럼 국민을 잘살게 해주겠다고 꿈만을 외치고 다닐 것인가. 독립협회운동에 나타났던 민주적인 정치문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것은 소홀히 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 명 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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