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병동의 선물…소아병동에 뜬 ‘키다리 산타’ 김신욱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12월 22일 05시 45분


국가대표팀 소집이 끝나자마자 18일 서울아산병원 소아혈액종양과로 향한 ‘키다리 산타’의 깜짝 방문에 모두가 즐거워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매년 성탄절을 즈음해 아산병원에서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들을 격려하며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김신욱의 모습은 후배 선수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국가대표팀 소집이 끝나자마자 18일 서울아산병원 소아혈액종양과로 향한 ‘키다리 산타’의 깜짝 방문에 모두가 즐거워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매년 성탄절을 즈음해 아산병원에서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들을 격려하며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김신욱의 모습은 후배 선수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혈액종양 환아 41명에 선물 증정
아이들 “한일전 봤어요” 엄지 척
김신욱 “꿈이 있으면 꼭 일어선다”
“나으면 경기 보러 오렴” 골 약속도


12월 18일. 그날은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함박눈이 밤새 펑펑 내렸다. 실력만큼 마음씨도 넓은 ‘키다리 산타’ 김신욱(29·전북 현대)과 일행은 새벽녘부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송파구 올림픽로 서울아산병원 146병동 소아혈액종양과 어린이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 질척거리고 미끄러운 빙판길, 교통체증을 조금이나마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어도 경기도 과천에서 서울 동쪽 끝자락으로 이동하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에서 축구국가대표팀은 라이벌 일본을 4-1로 완파하며 대회 정상에 올랐다. 17일 귀국하자마자 택한 첫 일정이 이날의‘나눔’이었다.

병원 측과 협조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병마와 싸우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구입해 일일이 포장하는 시간까지 더하면 2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하지만 어느 때보다 마음이 따스해진단다.

서울아산병원 어린이들과의 만남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포츠동아·동아일보·채널A가 주최하는 ‘동아스포츠대상’에서 타 팀 선수들의 투표로 ‘프로축구 올해의 선수’ 주인공이 된 김신욱(당시 울산 현대)은 “상금(1000만원)을 좋은 일에 사용하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첫 방문이 이뤄졌다. 전북 유니폼을 입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3번째 방문이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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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김신욱축구교실 식구들이 총출동했다. 여동생 수진, 동갑내기 개인 트레이너 이창현, 축구교실 민웅기·전민석 코치들이 한동안 방문 준비에 매달렸고, 행사 당일에도 함께 했다.

온몸에 여러 가지 생명 줄을 많이 달고 지내는 어린이들을 위해 올해는 블루투스 마이크와 이어폰을 준비했다. 선물 구입에 들인 비용만 수백만원에 달하지만 값으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다.

서울아산병원 어린이병동에 현금 2500만원을 기부한 김신욱은 병상에 입원해 있는 환아 41명 전부에게 선물을 증정했다. 뾰족한 헤어스타일의 덩치 큰 아저씨가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환한 미소가 터졌다.

림프종을 이겨내는 신은선(16·이하 가명) 양은 힘들어도 항상 의료진의 안부를 먼저 묻고 밝게 인사를 건네는 천성이 밝은 친구다. 역시 활짝 웃으며 “반가워요”를 외쳤다. 재생불량성 빈혈과 싸우는 박주미(13) 양도 휴대폰으로 기념촬영을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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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종양과 씩씩하게 맞선 홍정수(18) 군은 “형, 한일전 잘 봤어요. 2골이나 넣었잖아요. 대단해요”라며 꼭 껴안았다. 재생불량성 빈혈로 침상에 누웠던 박병민(13) 군도 벌떡 일어나 일행을 맞이했다. 골육종과 싸우며 작년에도 김신욱과 만난 최선구(18) 군은 “형, 더 까매졌네요”라며 엄지를 치켜들고 파이팅을 외쳐줬다.

하이라이트는 전주에 거주하다 수모세포종 치료를 위해 서울로 이사한 정승호(11) 군과의 만남이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을 자주 찾으며 축구선수를 꿈꾼 승호는 전날(17일)부터 김신욱을 기다리며 어깨춤을 추고 노래까지 흥얼거렸단다. “오오렐∼레(전북 응원구호) 아냐”는 물음에 “당연하다”는 승호에게 김신욱은 “네가 전주에 오면 멋진 골과 세리머니를 해주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이후 김신욱은 조혈모세포(골수) 이식을 위한 공간인 병동 무균실에 녹색 가운을 입고 들어갔다. 이중문에 막혀 대면할 수 없지만 일일이 인사하고 선물을 주며 온기를 전달했다.

아쉬움은 있었다. 당초 미니골대를 이용해 간단한 원 포인트 레슨과 미니 슈팅게임을 하려 했으나 안전문제와 공간이 좁아 퀴즈 쇼로 바꿨다. 그래도 열기는 뜨거웠다. 외래 환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모인 당초 참가 희망자들은 12명이었다. 눈이 내렸지만 이 가운데 10명이나 약속대로 참석했다.

입원 어린이 6명까지 16명과 가족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백혈병으로 3년 전 김신욱을 만났던 남효준(18) 군도 다시 자리했다.

“축구는 몇 명이 하는 운동?” “대표팀 원정 유니폼은 무슨 색?” “전북 유니폼 색채는?” “2018년 월드컵 개최국은 어디?”

전북 로고가 새겨진 미니 사인 볼을 증정하는 퀴즈가 끝나자 김신욱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어린이들에게 담담하게 들려줬다. 3차례 연달아 발목이 부러진 학창 시절, 수차례 축구를 포기하려 했던 갈등, 경쟁자들이 즐비한 프로에 입단했을 때의 막막함, 소속 팀과 대표팀에서 반복된 부침 등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과거는 오늘의 영광을 위해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다. 늘 화려해 보이는 선수의 아픈 기억에 공감한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리아(3)·수아(1) 두 딸의 아빠이자 국가대표 선수인 김신욱이 “1% 희망, 꿈이 있다면 틀림없이 일어선다. 자신을 사랑하고 간절하면 반드시 꿈은 이뤄진다”고 격려하자 여기저기서 갈채가 터졌다.

언젠가 현역을 은퇴하면 모든 부분이 부족한 가난한 국가에서 축구를 가르치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픈 그 자신도 힘을 얻는 시간이지만 잠시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가 다시 미소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악성종양을 견디며 병원학교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아 모범상을 받은 유수연(10) 양은 오락가락하는 몸 상태에 좌절하고 한동안 가슴 아파했지만 김신욱과 만난 뒤 처음으로 엄마에게 “힘이 난다”고 속삭였단다.

수개월여 치열한 레이스를 펼친 축구 선수들에게는 가족·친지들과 함께 하는 더 없이 소중한 휴식의 시간이자 새 시즌을 대비하는 시기인 매년 성탄절 무렵, 김신욱이 서울아산병원을 꾸준하게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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