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승건]‘검은 황영조’는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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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700km 떨어져 있는 투르카나 지역. 끝없는 사막으로 이뤄진 데다 연평균 기온이 40도 이상인 오지다. 이곳에 사는 투르카나족(族)은 케냐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부족이다.

이 부족 출신의 한 청년이 2011년 10월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찾아 경주국제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8). 이후 그는 한국에서만 뛰었다. 더 많은 상금이 걸린 대회를 마다하고 서울국제마라톤과 경주국제마라톤에서 3차례씩 정상에 올랐다. 궁핍과 차별에 시달리던 그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에루페는 2012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처음 우승한 뒤 귀화를 결심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수시 도핑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면서 일이 꼬였다. 에루페는 “말라리아 치료 목적으로 쓴 약물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해 2월 자격정지 2년이 풀린 에루페는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두 번째로 우승한 뒤 귀화를 공식 선언했다. 6월에는 충남 청양군청에 입단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올해 1월 대한체육회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이 신청한 에루페의 특별귀화를 심의 끝에 보류했다. 약물 복용이 걸림돌이 됐다. 이에 연맹은 대한체육회에 소명 자료를 제출했고 다음 달 재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에루페 측은 “고의성이 없음은 입증됐다. 경기력을 향상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면 징계가 끝나자마자 우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태극마크 팔찌를 차고 다니는 에루페는 20일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역대 국내 최고이자 올 시즌 세계 5위인 2시간5분13초의 기록으로 우승한 뒤 재차 귀화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에 이어 다시 논쟁에 불이 붙었다.

귀화 반대론자들은 “아프리카 출신이 국내 대회를 휩쓸면 한국인 마라토너는 다 죽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 마라톤은 이미 죽었다. 한국기록은 2000년 이봉주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에 멈춰 있고, 2011년 정진혁(한국전력)이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9분28초를 기록한 뒤로는 10분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세계기록은 2시간2분대. ‘메기 효과’라도 노려 보지 않으면 국제무대에 명함도 못 내민다. 국제 경쟁력 강화가 해당 종목의 저변 확대로 이어지는 법이다. 선수를 돈으로 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에루페는 중동국가처럼 돈을 주고 영입하는 경우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국민 정서도 거론된다. 마라톤은 고 손기정 선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이후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인 ‘민족’ 스포츠로 인식돼 왔다. 80년 전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2016년 대한민국은 다문화 국가다. 아이스하키에서는 이미 백인 특별귀화자가 나왔다. 마라톤과 달리 단체 종목이긴 하지만 반대 여론은 거의 없었다.

지난해 3월 동아닷컴의 여론조사 결과 80%가, 6월 청양군 여론조사 결과 74%가 에루페의 귀화에 찬성했다. 금지 약물을 고의로 복용한 게 아니라면 귀화 자체를 거부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why@donga.com
#투르카나족#에루페#서울국제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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