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은 프로야구 투수로서…’ 들려주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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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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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앞두고 방출, 10년차 투수 조태수의 시련기

“자세히 이야기 안 해도 아시지요?”

평소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던 2군 매니저가 갑자기 존댓말을 했다. 추석을 며칠 앞둔 ‘방출 통보’였다. 12월 1일 결혼식을 앞두고 직장을 잃었다. 쓸쓸히 짐을 싼 뒤 전남 함평 KIA의 2군 훈련장을 떠났다. KIA의 10년차 투수 조태수(28·사진)의 가을은 그렇게 스산했다.

야구계에서 가을은 ‘대박의 계절’이다. 자유계약선수(FA)들의 억대 계약 소식이 연일 신문 지면을 달군다. 하지만 그들은 프로야구 선수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30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보류선수명단 공시일을 앞두고 구단들은 가능성이 없는 선수들을 추려낸다. 조태수처럼 올가을에만 40여 명이 조용히 유니폼을 벗었다.

○ 가을에는 대박? 쪽박?

“결혼식 일주일 전까지는 꼭 갈게.”

조태수는 약혼자 노현미 씨(28)에게만 방출 소식을 전했다.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실직 사실을 숨기기 위해 광주 자취집에서 홀로 추석을 보냈다.

‘신랑은 KIA 타이거즈의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는 투수로서….’

조태수는 사회자의 멋진 소개를 받으며 식장에 들어서고 싶었다. 결혼식장은 KIA의 서울 원정 숙소인 강남구 리베라호텔로 예약을 해 놓은 상태. 그는 “KIA 소속일 때 잡아놓은 식장이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 당당한 결혼을 위해 포기할 순 없다

대안은 없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야구 외에 다른 할 일은 없었다. 새벽기도를 하며 남자친구가 1군 마운드에 서는 날을 기원해줬던 연인이 눈에 밟혔다. 내년 1월 31일 KBO 선수등록이 끝나면 다른 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받을 기회는 사라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 어디든 도전해야만 했다. “만약 새 구단을 못 찾으면 결혼하고 1년 동안은 내가 돈 벌게. 오빠는 입단 테스트 준비만 해.” 예비신부는 조태수의 마지막 도전을 응원했다.

조태수는 KIA 시절 인연을 맺은 이광우 화순고 감독을 찾아갔다. 화순고 야구부 합숙소에서 고교 선수들과 함께 뛰며 몸을 만들었다. 10월에 넥센, 11월엔 SK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결과는 불합격.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은 더해갔다.

2주 전 친정팀 KIA에서 조태수에게 연락을 해왔다. 원정 기록원을 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상대팀 경기를 분석하는 일이었다. “현역을 고집하는 게 제 욕심이란 생각을 처음 했어요. 연봉이 3000만 원이나 됐어요. 끝까지 챙겨주려는 친정팀이 고마웠죠.”

○ 나는 아직도 공을 던지고 싶다

선수 생활 연장을 접고 친정팀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는 순간 상무 시절 은사였던 김정택 감독이 전화를 걸어왔다. ‘제2의 독립구단 고양원더스’를 꿈꾸는 실업야구단 E&S 컴퍼니의 플레잉코치 직을 맡아보라는 제안이었다. 월급을 받으면서 프로 재입단을 타진할 수 있는 자리였다. 조태수는 현역 선수를 포기하지 않고 야구 판에 남겠다는 피앙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수락했다.

조태수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린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삼성의 4번타자 최형우도 결혼식을 올린다. 대부분의 야구 관계자들은 최형우의 결혼식장으로 발길을 옮길 것이라는 사실을 조태수는 안다. 하지만 그는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지켰음에 행복하다고 했다. “야구팬들이 2군 선수들을 조금만 더 응원해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10구단이 꼭 창단돼 많은 야구 선수가 뛸 수 있는 자리가 생기길 소망합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조태수#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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