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두산 투수코치 정명원 ‘PS 노히트 노런 통산방어율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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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8일 07시 00분


정명원 투수코치는 현역 시절 불같은 싸움닭 기질이 돋보이는 투수였다. 선수생활도 휘어짐 없는 직구 같았다. 그 남자다움은 새 팀 두산에서도 여전할 것이다.   스포츠동아DB
정명원 투수코치는 현역 시절 불같은 싸움닭 기질이 돋보이는 투수였다. 선수생활도 휘어짐 없는 직구 같았다. 그 남자다움은 새 팀 두산에서도 여전할 것이다. 스포츠동아DB
최창호·박정현과 태평양 전성시대
선발·마무리 나가면 던지는 전천후
싸움닭 기질로 선수시절 타자 압도

23년간 정든팀 떠나 두산에 새둥지
이젠 제대로 된 물건 하나 키워야죠


프로야구가 출범한지 30년, 셀 수 없이 많은 투수들이 마운드 위에서 수많은 볼을 던졌지만 노히트노런 기록은 단 12명에게만 허락됐다. 그 중에서 포스트시즌 노히트노런은 단 1명, 정명원(46) 두산 신임 투수코치가 유일하다. 이뿐 아니다. 1994년 김시진 현 넥센 감독(1985년)에 이어 투수로는 유이하게 미스터 올스타(1994년 태평양 3이닝 3탈삼진 무실점 퍼펙트)가 됐고, 통산방어율도 선동열(1.20), 고(故) 최동원(2.46)에 이어 역대 3위(2.56)에 랭크돼 있다. 2002년 본격적으로 코치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에도 유망주들을 끊임없이 길러냈고,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묵묵히 외길 인생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2012년, 23년간 몸담았던 팀을 떠나 두산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태평양에서 시작된 야구생활

정 코치가 야구를 시작한 건 여느 선수처럼 평범했다. 선생님의 권유. 중학교까지는 투수였지만 군산상고에서 쟁쟁한 투수들에게 밀려 내야수로 전향했다. 원광대 시절 김영빈 감독의 추천으로 다시 마운드에 올랐지만 4학년 때 체육학과 실기시험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이미 연고지에 ‘88올림픽 국가대표’ 조계현 이강철 등 특급투수들이 즐비한데 치명적인 부상까지. 그는 “지명받을 생각조차 못 했다”고 고백했다. 예상대로 연고팀 해태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대신 1988년 청보를 인수한 태평양에 2차 2순위로 지명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실업팀인 농협에 가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가 프로에 입단한 계기는 당시 태평양 구단사장이었던 신동관 부회장이 간부들과 함께 군산까지 내려와 끈질기게 설득한 덕분이다.

“김경문 감독님이 원광대에 친구 분이 계셔서 해마다 저희 팀 경기를 보러 오셨는데 그때 절 좋게 보셨나 봐요.”

○최창호∼박정현과 태평양 무적트리오 구성

정 코치는 선수시절 140km대 후반의 묵직한 직구로 정면승부를 즐기던 싸움닭이었다. 보직도 ‘나가면 던지는’ 전천후 투수. “양상문, 박은진, 조병천 등 선발투수들 뒤에 나갔다가 선발피처 없으면 또 나가고. 로테이션이 3일째가 최창호, 4일째가 박정현이었는데 둘은 무조건 완투형(1989년 최창호 38경기 중 완투 11번, 박정현 38경기 중 완투 17번)이었거든요. 등판 후에는 무조건 쉬어야하니까 제가 투입되고 그런 식이었죠.”

그해 최창호(10승·방어율 2.22)∼박정현(19승·방어율 2.15)∼정명원(11승·방어율 2.45) 트리오는 총 40승을 합작했다. 덕분에 태평양은 3위로 정규시즌을 마쳤고 ‘인천 프로야구팀 최초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3연패 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은 무산됐지만 지금까지도 인천팬들의 가슴속에는 마운드 위에서 힘차게 볼을 뿌리던 3인방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유일한 PS 노히트노런의 추억

정 코치는 1996년 10월 20일 인천 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완성했다.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는 창단 첫해 4위로 시즌을 마쳤고, 준플레이오프부터 승승장구한뒤 당시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해태와 한국시리즈에서 마주쳤다. 상대전적 1승2패로 몰린 4차전 현대 마운드에 정 코치가 깜짝 선발로 예고됐다.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선발승을 거두긴 했지만 당시 그의 보직은 마무리였다.

“김재박 감독님과 투수코치였던 김시진 감독님이 100%였던 제 승률에 주목하셨던 것 같아요. ‘넌 첫 타자만 잘 넘기면 가면 갈수록 좋아지는 스타일이다. 그냥 편하게 던져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팀 상황은 최악이었다. 준플레이오프(2승)와 플레이오프(3승2패)를 거치면서 투수들이 모두 탈진했고 주전포수 장광호가 부상을 당해 경기출장이 불가능했다. 결국 팀 운명이 걸린 경기에서 불펜에서 공을 받던 신인 김형남과 배터리를 이뤘다. 하지만 둘은 ‘기적’을 일궈냈다. 9이닝 동안 29타자를 상대해 무안타 3사사구(2볼넷, 1사구), 무실점. 포스트시즌 최초 노히트노런은 그렇게 탄생했다.

정 코치는 8회 점수가 나기까지 기록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9회 2사 후 든 생각도 ‘오늘 이 타자만 잡으면 되겠다’였다. 마음을 비운 덕분일까. 그는 마지막 타자를 3구삼진(직구 2개, 포크볼 1개)으로 돌려세우며 승리를 결정지었다.

“운이었죠. 대개 기록은 기술 3, 운 7이라고 하는데 그게 마침 저에게 온 거고.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가 만약 마운드 위에서 도망 다니는 피칭을 했다면 그런 기록은 안 나왔다는 거예요.”

○9년만의 KS우승 그리고 눈물

정 코치는 그렇게 전설을 세웠다. 하지만 아쉬움이 컸다. 한국시리즈 문턱까지 갔지만 우승은 남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우승컵은 1998년 LG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때 숱한 화제를 뿌린 또 하나의 명장면이 탄생한다. 정 코치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상대편 덕아웃을 향해 손짓했고, 비록 유니폼은 달랐지만 한때 같은 팀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뛰었던 박정현, 최창호와 기쁨을 함께 나눴다.

“현대가 투수는 좋았는데 방망이가 약했어요. 결국 최창호 박정현 최원호 김홍집 안병원 등을 타 팀으로 보내고 심재학 박종호 박재홍 전준호 심정수 박경완 등을 영입하면서 우승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우승이 결정된 순간 트레이드돼 떠난 선수들이 가장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함께 고생한 동료잖아요.”

그는 2000년 또 한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맛본 뒤 코치의 길로 들어섰다. 막상 은퇴하려고 하니 아쉬웠다. 게다가 그해 16경기에 나가 5승2패 방어율 3.98을 기록했다.

○지도자로서 또 한 번의 도전장

그래도 결정한 일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 요미우리에서 연수를 받았고 다시 현대로 돌아와 2002년 투수코치로 제2막을 열었다. 올해 또 다른 선택을 했다. 23년간 몸담았던 팀 울타리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 정 코치는 현재 두산 유니폼을 입고 있다.

“김시진 감독님이 지난 시즌이 끝나고 2군 감독을 맡아달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한 팀에만 있다보니까 나태해지는 것도 느끼고 새로운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이제는 1군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새 유니폼이 어색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여전히 넥센 선수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그래도 그는 설렌다고 했다. “두산에는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선수들이 정말 많아요. 솔직히 용병을 제외하고 최근 몇 년간 10승한 투수가 몇 명입니까. 1명 정도는 확 치고 올라올 때가 됐어요. 훈련은 혹독할 겁니다. 하지만 강한 투수진을 만들어야 팀이 단단해집니다.”

정명원 코치는?

▲생년월일=1966년 6월 14일
▲출신교=군산남초∼군산남중∼군산상고∼원광대
▲키·몸무게=189cm·90kg(우투우타)
▲프로 경력=1989년 태평양 2차 2순위 지명∼1996년 현대∼2000년 은퇴
▲코치 경력=2002년 현대 투수코치∼2008년 넥센 투수코치∼2012년 두산 투수코치
▲프로 통산 성적=395경기 1093.2이닝 75승54패 142세이브 634탈삼진 방어율 2.56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트위터@hong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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