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체념…침묵…요지경 스토브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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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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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야구 연봉협상 백태

“우승한 날은 천국이었어요. 그런데 이튿날부터 가시밭길이네요.”

얼마 전 만난 KIA의 한 직원은 하소연부터 했다.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한 기쁨은 잠시뿐 곧바로 해결할 문제가 쌓였다는 것이다. 가장 골치 아픈 게 주축 선수들과의 연봉 협상이다. 시즌 직후 시작되는 ‘스토브리그(난롯가에 앉아 연봉 협상이나 트레이드 등을 논의하는 것에서 유래)’는 모든 팀이 겪는 연례행사다. KIA의 스토브리그는 유독 뜨겁다. 최근에는 최희섭이 내년 연봉을 2억 원에서 3억500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는 구단의 제시액을 듣고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폭탄 발언까지 했다.

○ 쿨한 스토브리그(?)

연봉 협상이라는 게 그렇다. 선수는 조금이라도 더 받길 원한다. 구단은 한푼이라도 덜 주려 한다.

때로는 시원한 연봉 협상도 있다. 지난해 두산 임태훈이 그랬다. 당시 임태훈은 6승 5패 6세이브에 14홀드로 팀 불펜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여느 선수라면 연봉 대폭 인상을 요구하며 구단의 속을 태울 만도 했다. 하지만 임태훈은 첫 만남에서 금액을 제시하는 대신 “요즘 두산그룹이 경제불황으로 어렵죠”라고 물었다. 담당자가 “그렇다”고 하자 “어차피 구단도 그룹의 지원을 받는 건데 제 연봉도 많이 오르진 않겠네요”라고 했다. 또 “그렇다”고 하자 임태훈은 6000만 원에서 3000만 원 오른 9000만 원을 제시했고 구단도 이를 받아들였다.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박용택도 ‘쿨 가이’라는 별명답게 쿨하게 협상하는 선수로 유명하다. 그의 올해 연봉은 1억5000만 원. 임승규 LG 운영차장은 “그동안 억울한 점이 많았을 텐데도 큰 갈등 없이 사인했다”고 말했다. 올해 타격왕을 차지한 박용택은 “이제 내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LG 구단은 박용택의 합리적인 성격을 볼 때 연봉 협상에 큰 마찰은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 최악의 선수는 답답형

읍소형, 막무가내형, 협박형…. 협상장에 들어오는 선수마다 스타일은 제각각이다. 그중 연봉 협상 담당자들이 가장 꺼리는 유형은 ‘답답형’. 말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구단이 액수를 제시해도 묵묵부답이다.

막무가내형도 어렵긴 마찬가지. 무조건 높은 액수를 부른 뒤 왜 그렇게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 구단 담당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한 뒤 조금씩 깎는 선수들이 있다. 그런 선수에겐 구단도 알아서 낮은 금액부터 시작한다. 결국은 선수가 손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과거와 달리 준비를 철저히 하는 선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조현봉 롯데 운영팀장은 “요즘 젊은 선수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 온다. 구단으로선 점점 협상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 “겨울만 되면 난 죄인”

연봉 협상 담당자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본의 아니게 연봉을 깎아야 하는 경우다. LG는 최근 마무리 투수 이재영과 전년도보다 500만 원 깎은 1억1500만 원에 재계약했다. 임 차장은 “성적(5승 3패 11세이브)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7위에 그쳤던 팀 성적을 재영이가 선뜻 이해해 줘 고마웠다”고 했다. 삼성 박덕주 운영팀장은 “허슬플레이를 하다 다친 선수의 연봉 협상을 할 때 죄인이 된 기분이다. 팀을 위해 뛰다가 그런 것인데 삭감 대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삼성은 그런 차원에서 올해 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오승환(2억6000만 원)과 권오준(1억2000만 원)의 연봉을 동결할 방침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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