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필드의 포청천… “날 기억하지마!”

  • 입력 2009년 9월 16일 0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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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경기 출장 대기록 달성한 오석환 심판원의 19년 심판 인생

수만 관중의 함성으로 뜨거운 그라운드. 선수들은 관중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할 때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정 반대로 함께 그라운드에 서있지만 경기가 모두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명도 자신을 부르지 않을 때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명장면, 명승부를 함께 했지만 그 순간마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때 참된 보람을 느낀다.

주인공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회 오석환(45) 차장. 1991년부터 올해까지 19년째 그라운드를 지키고 있는 심판. 오 차장은 1991년 4월5일 대전 쌍방울-한화전에 3루심으로 처음 출장했고 19년의 세월이 흘러 9월 1일 잠실 한화-두산전에서 역대 2번째로 2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오 차장은 “2000번째 경기가 심판으로는 최악이었다. 관중도, 선수도, 모두 그날 심판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이 끝날 때, 심판에게는 최고의 경기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고독한 심판의 삶

광주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오 차장은 “제게 인터뷰할 게 뭐 있겠냐?”며 웃었다. 오 차장은 2000경기 출장보다 스스로 오심을 인정해 2경기에서 빠진 것을 제외하면 19년 동안 단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점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2000경기는 숫자일 뿐입니다.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19년 동안 매 경기를 위해 스스로 몸 관리에 최선을 다했어요. 단 2경기를 제외하고 그동안 1군 경기를 빠짐없이 지켰다는 점은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워요. 돌이켜보면 오심 때문에 제외된 2경기가 아깝죠. 그 때 오심이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오 차장은 2006년 6월 6일 대전 SK-한화전 9회말. 3-4로 추격중인 한화의 마지막 공격 때 홈으로 쇄도한 김인철을 아웃으로 판정한 뒤 경기를 끝냈다. 그러나 이후 포수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각도에서 김인철이 먼저 홈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명백한 오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징계도 자처했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기억이 똑똑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싹 지웠어요. 오심은 오심으로 끝내야 합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에 남아있으면 안돼요. 흔히 ‘보상 판정’이라고 하죠? 그런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 떠나보내야 해요. 깨끗이 지워버립니다.”

대학 때까지 야구를 했던 오 차장은 많은 선·후배가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후배 중 현역 프로선수, 코치도 다수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절대 만나지 않는다. 항상 먼저 피했다. “식당도 야구하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골라서 갑니다. 지금까지 우리 심판들이 그런 면에서 큰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조금씩 싸서 말려라’

오 차장은 인터넷도 잘 하지 않고, 밤에는 책도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TV시청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눈이 피로하면 혹시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다 피하고 있어요. 특히 구심을 맡을 때에는 며칠 전부터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해요. 구심은 한 경기에서 300개가 넘는 공을 판정해야 합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죠. 심한 사람은 구심 한번 하고나면 2kg씩 살이 빠지기도 합니다.”

특히 심판은 5회 클리닝타임 전까지 생리적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 5회 이후에도 후반 경기가 길어지면 3시간 가까이 그라운드에 꼼짝없이 서있어야 한다. 오 차장은 “예전 선배들이 어쩔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 되면 ‘조금씩 싸서 말려라’고 했는데 사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웃으며 “특히 여름에는 콩국수, 꼬막, 냉면 등 쉽게 상할 수 있는 음식을 절대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군산상고 4번 타자에서 심판 3수생으로

25년 전 군산상고 4번타자 오석환은 2학년 때부터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밥 먹듯이 했다. 특히 3학년 때 군산상고는 천하무적. 마운드는 2학년 조계현 현 삼성코치가 책임지고 타선은 1루수 겸 4번타자 오석환이 이끌었다. 그러나 경희대 재학시절 갑자기 집안이 기울며 생계를 책임져야했고, 유니폼을 벗었다. 일반 회사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만은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했다. “1988년에 심판을 공채로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했죠. 심판아카데미도 다녔고 시험도 잘 봤어요. 300명 중 최종 7명까지 들었는데 미역국을 먹었죠. 이듬해 다시 도전했는데 또 떨어졌어요. 그 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심판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3수를 했죠.”(웃음)

1990년 공채 3기로 심판이 된 오 차장은 1991년 4월5일 1군 경기에 데뷔했다. “구름에 떠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심판들도 첫 게임은 긴장됩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19년이 지났습니다.”

○디지털시대의 심판

오 차장이 처음 심판복을 입었을 때는 TV로 중계되는 경기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터넷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페넌트레이스 모든 경기가 한층 발전된 중계기술로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심지어 ‘S존’(투구추적시스템)까지 등장해 심판들은 괴롭다. 혹 오심이라도 나오면 인터넷이 금세 뜨거워진다.

아날로그 시대에 심판을 시작, 디지털시대를 지내고 있는 오 차장은 “솔직히 머리가 아프다”며 웃었다. “S존도 화면에 보이는 것과 실제 공이 들어오는 코스가 다를 때가 있어요. 우리끼리 센서를 홈 플레이트에 부착해서 기계가 판정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합니다. 실제 그런 실험이 미국에서 있었지만 경기 진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해요. 판정뿐 아니라 경기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것도 심판의 큰 몫이죠. 많은 것이 변했어도 심판이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모습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 차장은 내후년 이규석 전 심판의 2214경기 기록을 돌파해 역대 심판최다경기 출장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자신은 2000경기와 마찬가지로 기록달성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2000경기 앞두고 이규석 선배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어요. 몸 관리 잘해서 많은 후배들이 더 많이 가야한다고 당부하셨어요. 기록이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심판양성 체계는 일본도 부러워할 만큼 자리를 잡았습니다. 앞으로 2000, 3000경기에 출장하는 심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기록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심판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아 프로야구 발전에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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