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TV로 방영된 ‘탈북 꽃제비’가 바로 접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30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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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와이셔츠를 입은 전충일 씨가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전충일 씨가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1999년 9월 2일. 한국 관광객들을 태우고 백두산으로 향하던 버스를 향해 남루한 행색의 북한 꽃제비 꼬마 3명이 손을 흔들었다. 중국 연변 화룡현 근처 어디쯤이었다.

버스가 서고 몇몇 관광객이 내려 관심을 표하자 아이들은 “우린 북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린 남에서 왔단다. 서울을 아니?” 등의 질문을 던지며 물과 사탕을 주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이름과 고향을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 버스에는 마침 한국 모 방송사 취재팀도 타고 있었다. 꽃제비들의 모습은 북중 국경에서 구걸하는 북한 어린 꽃제비들이라는 주제로 방영됐고, 북한 보위부에서도 방송을 모니터링해 이들의 신상을 파악했다.

버스가 떠난 뒤 아이들은 태어나 처음 들은 서울말을 흉내 내며 가던 길을 즐겁게 갔지만, 다음날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3명 중 한 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까지 나왔고, 다른 한 명은 한국으로 와 미디어 관련 회사를 차렸다.

한국 방송사 카메라에 잡힐 당시 키 125㎝의 13세 꼬마 전충일 씨가 한국에 온 한 명이다. 그는 한국에 오기까지 두만강을 일곱 번 넘었고, 북송과 감옥 생활을 거듭 겪어야 했다.

●가족과 생이별
1999년 가을 중국으로 탈북해 조선족 양부모에게 입양된 직후의 전충일 씨. 당시 키가 125㎝에 불과했다.
1999년 가을 중국으로 탈북해 조선족 양부모에게 입양된 직후의 전충일 씨. 당시 키가 125㎝에 불과했다.
전 씨는 1986년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25호 관리소’, 일명 수성교화소가 전 씨의 집 근처에 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지질탐사대에 다녔고, 어머니는 전 씨와 네 살 아래 남동생을 돌보며 집에서 부양가족으로 지냈다.

전 씨가 인민학교 1학년에 막 입학하고 몇 달 되지 않았던 때에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리고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전 씨는 연이어 닥치는 비극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그가 인민학교 3학년이던 1997년 아버지는 청진 외곽 석막이란 곳에 부업지 농사 담당으로 파견됐다. 전 씨의 가족도 아버지를 따라 ‘금채동 골안’으로 불리는 외진 산골로 옮겨왔다. 농사를 지으면 굶어죽지 않을 거란 희망은 얼마 안돼 무너졌다. 배고파 종자도 훔쳐 먹는 때에 농사라고 잘 될 리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날이 많아지고, 급기야 이듬해 어머니가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며 동생을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사실상 부모가 이혼한 것이다.

전 씨는 아버지와 함께 산골에 남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더니 이듬해 2월 간 경화와 복수로 세상을 떠났다. 13세 전충일은 집에 혼자 남게 됐다.

● 꽃제비가 되다

1999년은 전 씨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모으고, 다음날은 시내에 가서 나무를 파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당시 그의 키는 125㎝였다. 이런 꼬마가 손수레에 나뭇단을 싣고 20리길을 2시간 넘게 걸어가 시내 장마당에서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일을 쉬지 않고 한 것이다. 당시 석막에서 청진으로 가는 도로에는 나무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는 아이들이 줄을 이었다.

손수레 하나를 팔면 당시 북한돈 20~30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손 쉽게 먹을 수 있는 ‘펑펑이 가루’나 콩비지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또 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몇 달쯤 지나자 집에 동생이 불쑥 나타났다. 사연을 들으니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하러 무산에 갔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거리를 떠돌며 빌어먹다가 우연히 마을 사람을 만났고, 그가 형에게 데리고 온 것이었다. 자기 혼자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충일은 9살 동생도 책임져야 했다.

아이들의 어려움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지 어느 날 인근에 살던 삼촌이 와서 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충일은 삼촌 집에서도 나무를 팔아야 했다. 다행히 삼촌이 밑천을 조금 대주어 이번엔 산에 가서 나무를 캐는 대신, 산 아래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갖고 온 나뭇단을 샀다. 그걸 보기 좋게 다시 묶어 장마당에 가서 팔면 두 형제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 수 있었다. 삼촌은 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밭에 가서 돼지에게 줄 풀을 뜯어오게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산으로 가는 일과가 반복됐다. 그런데 몇 달 뒤 사고가 터졌다. 8월 어느 날 무더위 속에서 장마당에 갔는데 그날따라 나무가 잘 팔리지 않았다. 피곤했던 충일은 손수레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나 보니 손수레만 있고 나무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돌아가면 삼촌에게 엄청 매를 맞아야 했다. 삼촌은 두 형제를 수시로 때렸는데, 나무를 잃어버리기 며칠 전에도 죽도록 때렸다. 돼지풀을 뜯어야 할 동생을 몰래 시내로 데려가 그가 좋아하는 ‘까까오(북한식 얼음과자)’를 사먹였다가 들켰다. 동생에게 까까오를 들고 가면 녹아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갔던 것인데, 삼촌에겐 배은망덕한 행위로 비춰진 것이다.

나무를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삼촌이 어떻게 할지 눈에 선했다. 충일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꽃제비 무리에 합류했다.

그러나 청진역에서 시작한 꽃제비 생활도 며칠 가지 못했다. 단속원들에게 걸려 청진시 해안여관을 개조해 만든 ‘꽃제비 구호소’에 끌려가 수감된 것이다. 먼저 잡혀온 꽃제비들은 “여기에 있다간 굶어죽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저녁이라고 나온 것을 보니 영양가루로 만든 떡국이었는데, 건더기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잡혀간 날 밤에 충일은 다른 꽃제비 3명과 함께 구호소를 탈출했다. 청진역에 가면 또 잡힐 것 같아 이번엔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났는데, 종점에 도착하니 북중 국경인 무산이었다. 꽃제비 생활을 갓 시작한 충일은 구걸도 잘 못하고 훔치는 것도 잘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굶어죽을 것 같았다.

그때 인민학교 때 봤던 영화 ‘대홍단책임비서’가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당 비서는 지역 내 부모 잃은 고아들을 데려다 돌봐주는 훌륭한 간부로 묘사됐다. 무산에서 대홍단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돈이 없는 그는 이틀을 내리 걸어 대홍단까지 갔다.

가보니 영화처럼 고아를 키우는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그때는 감자철이었다. 무연하게 펼쳐진 감자밭 주변에 경비움막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움막 중 한 곳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작은 아이가 불쌍했던지 아니면 심심해서였던지는 모르겠지만, 경비원은 그를 움막에서 자게 승인했다. 그때부터 충일은 감자만 구워 먹었다. 일주일 내내 감자만 먹으니 입술이 갈라지고 힘이 없었다. 1998년 10월 대홍단을 시찰한 김정일은 “감자는 곧 흰쌀”이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충일이 직접 감자를 먹어보니 일주일도 먹기 어려웠다.

2022년 4월 남북통합을 주제로 한 대학생 플래시몹 행사를 촬영하던 모습.
2022년 4월 남북통합을 주제로 한 대학생 플래시몹 행사를 촬영하던 모습.


● 두만강을 건넌 꽃제비들

이곳을 떠나 딴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무산 쪽으로 가다가 비슷한 연령대의 꽃제비 두 명을 만났다. 한 명은 충일처럼 꽃제비 경력이 별로 없었는데, 한 명은 베테랑 꽃제비로 훔치는 것도 잘했고, 중국에 건너갔다 온 경력도 있었다. 베테랑 꽃제비가 중국에 건너갈 것을 제안했다. 중국에 가서 빌면 돈도 주고 밥도 준다는데, 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는 백두산 아래 대홍단은 국경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두만강도 물살은 좀 세도 폭이 넓지 않아 건너기 쉬웠다. 세 꼬마는 대낮에 강을 건너 중국에 넘어갔다. 민둥산을 오르며 이들은 하루에 한 마을만 돈다는 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 마을에 들어가서 “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니 저마다 혀를 끌끌 차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소고기까지 먹였다. 북한에선 아무리 빌어도 밥 한 숟가락 얻어먹기 힘들었는데, 강 하나를 두고 이런 별천지가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시내에 가면 교회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너희들을 먹여주고 재워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 이들은 화룡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첫 마을에서 동정의 온기를 느꼈던 터라 겁도 사라졌다. 이들은 길을 지나가는 차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 것이 한국 관광객들이 탄 버스였고, 이들의 모습은 한국에서 방영됐다. 버스와 헤어진 다음날 이들은 어느 한족 마을에 가서 다시 “조선에서 왔습니다”고 외쳤다. 밖에서 밥을 먹던 한족 하나가 이들을 불러 밥을 주었다.

이때 주변을 지나가던 공안 한 명이 다가와 “고기만두 먹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안은 화룡 공안국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공안국에 가니 정말 고기만두를 사주었다. 아이들은 중국은 안전원도 친절하다고 놀랐다.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좀 기다리면 교회에 데려다 준다는 말을 믿고 방에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 나타난 다른 공안은 태도가 험악했다. “네 놈들 때문에 명절에 쉬지도 못하고 나왔다”며 욕을 엄청 퍼붓더니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릴 어디로 보내나요”라고 묻자 “어딜 보내긴, 조선에 보내야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자기들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변방 구류장에 끌려가 닷새를 보내고, 9월 8일 이들은 북한에 송환됐다. 하도 어린애들이라서 그런지 보위부에선 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곧바로 ‘무산구호소’로 보냈다.

도망칠까봐 팬티만 입혀놓은 채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이들은 팬티만 입고 다시 밤에 도망을 쳤다. 마침 다음날이 북한 국경절인 9월 9일이라 감시가 심하지 않았다. 이번엔 한 명이 더 합세해 4명이 됐다.

이들이 갈 곳은 뻔했다. 중국을 한 번 경험하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잡히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을 넘었다. 두만강을 넘은 뒤 베테랑 꽃제비가 제안했다. 4명이 몰려다니면 체포되기 쉬우니 둘씩 갈라지자는 것이다.

베테랑은 새로 합세한 애와 함께 갔다. 충일은 나중에 미국에 간 친구와 한 팀이 됐다. 그렇게 갈라진 베테랑의 삶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 충일은 알지 못한다. 지금 살아있으면 그도 37세가 됐을 것이다.

●인신매매 브로커

친구들과 헤어져 둘만 남은 충일의 팀은 길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마침내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조선족 남자는 이들을 산에 있는 움막에 데려가 밥도 주고 옷도 사주었다. 며칠 그렇게 살았는데 조선족이 속내를 드러냈다.

“너네 조선에 나가 여자를 데리고 올 수 있나. 그럼 내가 돈을 줄게.”

충일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는 여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대홍단에서 만난, 충일이보다 더 어린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던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식 또래의 충일이 불쌍했던지 밥도 나눠주고 자기 집 주소도 알려주면서 “나중에 잘 되면 찾아오라”고 했다.

그녀가 알려준 집은 아오지 탄광으로 잘 알려준 은덕군이었다. 조선족에게 “그 아줌마에게 한번 찾아가면 어떨까”라고 말하니, 안색이 밝아졌다. 이들은 조선족의 차를 타고 국경을 따라 올라가다가 회령 근처에서 두만강을 넘었다.

조선족은 여비를 하라며 두 아이에게 각각 인민폐 100위안씩 건네주었다. 북한에 건너가 돈을 바꾸니 2700원이 됐다. 과거 충일이 나무를 한 달 내내 팔아 모아도 만질 수 없는 액수였다. 조선족의 통 큰 씀씀이에 감동한 꼬마들은 반드시 그의 임무를 관철하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이들은 은덕에 도착했고, 아줌마를 만나는데 성공했다. 중국에 가면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줌마는 선뜻 따라가겠다고 했다. 주변에 더 갈 여자가 없냐고 하자 중국에서 살다가 북송된 경력이 있는 동네 여성 3명이 합류했다. 충일과 친구는 은덕 아줌마와 두 자녀, 합세한 여성 3명 등을 데리고 무사히 중국으로 다시 넘어왔다.

조선족은 차를 타고 마중 나와 이들을 움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어느 날 충일과 친구가 몰래 마을로 나가 밥을 빌어먹고 돌아오니 여인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줌마와 자녀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팔려가는 길임을 알고 따라온 이들인지라 먼저 살던 곳과 연락해 사라진 것이다. 아줌마도 이들과 함께 도망칠 수가 있었지만, 아이들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교회로 보내준다는 조선족을 믿어보기로 하고 남았다.

조선족 남자는 돌아와서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는 충일과 친구, 그리고 은덕 아줌마의 두 자녀를 차에 싣고 시내 어느 작은 교회로 데리고 갔다. 혼자 움막에 남은 아줌마의 운명은 이후 알 수가 없었다.

작은 교회에선 아이들 넷을 다시 연길의 큰 교회로 데리고 갔다. 큰 교회에선 다시 어느 30대 중반의 조선족 집으로 보냈다. 이 집은 한국에서 온 이광식 목사가 운영하는 여러 피난 처소 중 한 곳이었다. 조선족 부부는 6명의 탈북 고아들을 키웠다. 고아들은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

나중에 은덕 아줌마의 두 자매 역시 한국에 왔고,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

충일은 그때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저 때문에 두 자매가 어머니와 헤어진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든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은덕 아줌마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충일은 13살이었다. 은덕 아줌마도 자신이 중국에 팔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 결단했을 것이다. 당시 아오지에선 무리로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였다. 살 수만 있다면 팔려가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2003년 중국 청도에서 교회 성탄 행사에 참가한 전충일 씨.
2003년 중국 청도에서 교회 성탄 행사에 참가한 전충일 씨.


● 보위부에 체포

1999년 한 해 동안 충일에겐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집에서 살다가 꽃제비가 됐고, 탈북과 북송을 반복한 끝에 연길의 한 조선족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온 이 목사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컸다. 가정교사를 불러 여러 처소에서 공부하는 탈북 고아들에게 국어와 중국어, 수학, 영어, 성경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후 국경에서 단속이 심해지자 처소를 청도로 옮겨갔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충일은 17살 청년이 됐다. 처음 넘어왔을 때 키가 또래보다 훨씬 작았지만, 그동안 키도 쑥쑥 커서 167㎝가 됐다.

철이 들면서 충일은 늘 고향에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삼촌집에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돼지 풀을 뜯으러 다닐 것이란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2003년 충일은 함께 넘어온 친구와 함께 고향의 가족을 찾아보기로 하고 청도를 떠났다. 이번에도 몰래 두만강을 넘는데 성공했고, 삼촌집이 있는 동네까지 도착했다. 삼촌 어머니가 운영하는 매점에 들려 먹을 것을 샀는데, 삼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삼촌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 충일입니다”고 하자 삼촌이 엉엉 울었다.

다음날 인근 고모의 집에 갔는데 고모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모부가 “네가 없어진 얼마 뒤 보위원들이 찾아왔다. 네가 중국 가서 빌어먹는 장면이 남조선 텔레비에 나왔다고 말해주더라. 우린 너를 사망 처리하고 지냈다”고 말했다.

동생은 삼촌집에 없었다. 그가 탈북한 후 어머니가 나타나 동생을 데리고 다시 수성의 고향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엄마만은 한 눈에 아들을 알아봤다. 충일은 엄마에게 4년 전 무산에서 왜 남동생을 버렸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아마 그때 엄마는 중국에 갔다 온 것 같다는 것이 충일의 짐작이다.

가족과 재회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위부에서 그를 찾아와 끌고 갔다. 알고 보니 함께 나온 친구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마을에 와서 충일을 찾았는데,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보위부에 신고했던 것이다. 조선족의 집에서 4년을 크다보니 어느새 이들의 말투는 고향에서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변했던 것이다. 충일의 말투도 친구와 똑같다보니 그도 덩달아 체포됐다.

보위부에선 이들에게 한국 사람을 만났는지, 교회에 갔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둘은 중국에서 농사를 했다고 버텼다. 한 달 쯤 지났을 때 조사하던 보위원이 두툼한 서류를 이들 앞에 내밀었다. 그걸 보고 충일은 경악했다. 청도에서 함께 살던 사람들의 신상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한국 목사가 운영하던 처소에서 4년을 살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이들은 평양 국가보위부 본부가 직접 수사하는 죄인이 됐다. 6월에 체포돼 12월까지 6개월 간 보위부 구류장에서 조서를 쓰는 일을 반복하며 보냈다.

12월 31일에 갑자기 보위부장이 불렀다. 갔더니 “장군님의 은덕으로 너희는 당시 너무 어렸다는 것을 참작해 석방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04년 설날은 집에서 보내게 됐다.

● 동생을 데리고 다시 탈북

중국을 경험했던 충일은 북한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는 동생에게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동생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이밥에 고기를 실컷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천국이었다. 어머니에겐 차마 남동생을 데리고 간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형제는 3월초 집을 나서 눈보라 치는 3월 8일 국제부녀절(세계 여성의 날) 밤에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넘어 조선족 양부모에게 전화를 하자 이들이 마중 나왔다. 충일이 북한에 있던 사이 청도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청도 팀 중 한 명이 신분증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처소를 떠나 떠돌다가 공안에 체포됐는데, 그가 모두 불어버린 것이다.

충일은 연길에 다시 머물게 됐다. 5개월쯤 지나자 이번엔 엄마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두 아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고통이 클까에 생각이 미치니 마냥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까지 데리고 중국에 나오는 것이 목표였다. 2004년 8월 그는 북한에서 팔 수 있는 옷가지들을 한 짐 쥐고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운이 나빴다. 국경경비대에 체포돼 여단 구류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무슨 방침이 하달됐는지 군인들이 함부로 옷을 빼앗지 못했다. 구류장에 들어갈 때 옷과 신발 숫자까지 다 장부에 기록하고, 출소할 때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침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에겐 방법이 있었다. 조사할 때 군관이 어디선가 가져 온 낡은 옷들을 꺼내들며 “이거 네 것이 맞지”라고 물었다. 맞다고 하면 때리지 않았다. 대신 충일이 갖고 온 새 옷은 낡은 옷으로 바뀐 숫자만큼 사라졌다. 이런 바꿔치기를 두세 번 정도 당하고 나니, 그가 갖고 온 옷 가방은 모두 헌옷으로 차게 됐다. 옷 개수만 맞을 뿐이었다.

옷 때문인지, 아니면 제 발로 강을 넘어온 것이 참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보위부에 넘겨지진 않았다. 대신 청진에 있는 ‘도 집결소’에 끌려가 4개월 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석방됐다. 석방돼 나와 보니 중국에 살고 있어야 할 동생도 집에 와있었다.

2009년 한국에 도착한 직후 대안학교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때의 전충일 씨.
2009년 한국에 도착한 직후 대안학교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때의 전충일 씨.


● 북한에서 3년 직장생활

2004년 충일은 18살이 됐다. 그 나이면 북한에선 군에 입대하든가, 직장에 들어가야 했다. 탈북했다가 두 번이나 체포돼 수감생활을 했던 충일은 군에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청진뜨락또르(트랙터) 부속품 공장 노동자로 임명됐다.

당시 공장은 거의 가동을 못하고 있었다. 충일은 CD녹화기 수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뭔가 뜯고 수리하는 일을 즐겼다. 중국에 있을 때도 전자제품만 보이면 무조건 뜯어 분해해보곤 했다. 2003년경부터 북한에는 한류 열풍을 타고 CD녹화기를 장만하는 붐이 불었다. 그런데 고장 나면 중국제 부품들이라 수리를 잘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중국에서 공부했고, 전자회로판을 수없이 만졌던 충일은 중국 부품 설명서를 척척 읽어가며 고칠 수 있었다.

고장 난 일본제 TV를 컬러TV로 바꾸는 것도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됐다. 일본제 TV는 수상관은 좋았지만, 110볼트를 쓰게 만들었기 때문에 북한에 가면 흑백으로만 볼 수 있었다. 그는 농촌을 돌며 고장 난 TV를 사서 내부는 중국산 부품들로 바꾸어 컬러TV로 변신시켰다. 북한에서 약전 기술자는 꽤 돈을 버는 부업이었다. 그도 수리를 해주면서 녹화기도 사고, 자전거도 사는 등 나름 돈을 꽤 벌었다.

그렇게 충일은 3년 반 동안 북한에서 살았다. 항상 중국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돈을 잘 버니 다시 한 번 목숨을 걸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다.

지난해 8월 한 밴드 그룹의 야외 영상을 촬영하는 모습.
지난해 8월 한 밴드 그룹의 야외 영상을 촬영하는 모습.


● 일곱 번째 탈북과 한국행

하지만 2007년이 되자 두 가지 견딜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는 엄마가 재혼하려 했던 일이다. 충일은 “우리와 같이 살면 되지 왜 딴 남자 만나서 살려 하냐”고 극렬히 반대하다가 집을 나와 버렸다.

이제 30대 후반이 된 충일은 그때를 떠올리면 너무 후회가 된다.
“지금 같아선 엄마가 누구와 만난다 해도 무조건 찬성할 텐데, 그때 왜 그리 그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집을 나와 사촌누나의 집에서 살았는데, 친척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쟤가 마음잡고 살게 하려면 장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친척들의 의견이었다. 어떤 처녀와 일사천리로 혼담이 오가고 강제로 결혼까지 하게 될 판이었다. 그때 그는 겨우 21살이었다.

결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부모가 이혼하는 것을 보고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난 탓도 있지만, 다시 중국에 갈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도 컸다. 결국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두만강을 일곱 번째로 넘었다.

3년 만에 와서 연길의 양부모를 찾았는데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 갔다고 들었다. 강을 넘자마자 국경 마을에 들어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동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에서 왔다고 하면 밥을 주며 동정하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일으킨 각종 사건사고 소식이 퍼지면서 조선족들은 탈북자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고 문전박대했다. 그래도 동정심이 남아 있는 집이 하나는 있었다. 그 집에서 준 30위안의 차비를 갖고 충일은 연길 시내로 들어왔다.

변두리에 있는 어느 조선족 교회를 찾아갔더니 목사가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라서 헌금이 들어온 것이 없다”고 미안해하면서 자기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꺼내주었다. 그래도 300위안의 거금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대련까지 갔다. 대련에 가서 다시 어느 교회에 들어갔는데 마침 어느 선교사가 “너 이광식 목사님 밑에서 공부하던 애가 아니냐”며 알아봤다. 그렇게 이 목사와 연락이 됐고, 그는 다시 이 목사가 심양에서 운영하던 기독교 처소에 들어갔다. 이 목사는 그에게 신분증을 만들어주었고, 그의 적성에 맞게 단둥에 있는 컴퓨터전문학교에 입학시켜주었다. 학교에 입학해 몇 달쯤 지났을 때 한국에 간 양부모님들과도 연락이 됐다. 양어머니는 그에게 한국에 오라며 선까지 연결해 주었다.

2007년 11월 그는 중국을 떠났다. 7명이 한 팀을 이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2008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8월 하나원을 나온 그는 경기도 안성에 정착했다.

한국에 와보니, 그가 북한에서 살던 사이 과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꽃제비 친구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오지 않고 3국에서 곧바로 미국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2022년 작업실에서 음악 관련 영상을 찍은 뒤 편집에 몰두하고 있는 전충일 씨.
2022년 작업실에서 음악 관련 영상을 찍은 뒤 편집에 몰두하고 있는 전충일 씨.


●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충일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면서 “한국에 가면 모든 일을 다 해보자”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맞을지 너무 궁금했다. 학교는 인민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으니 대학에 가서 따라가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한국에 와서 그는 실제로 그 결심대로 살았다. 첫 직장은 유리공장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았다. 안성에 사는 젊은 탈북민들이 신변 담당 경찰의 추천으로 우르르 몰려가 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1년쯤 지나니 어느새 다 사라져버렸다. 충일도 온갖 일을 다 해보겠다는 다짐을 했던지라 유리공장을 나와 다른 일을 찾았다.

이후 그는 스스로 표현대로라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했다. 수십 가지 직업을 가져봤다. 그에게 일은 경험이었다. 각종 생산직과 건설 일용직, 식당, 나이트클럽, 노래방 심지어 유흥주점까지 겪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로프를 타고 고층빌딩의 유리를 닦는 일도 3개월 했다.

경험했던 중 가장 힘든 일은 가방 장식에 도금을 하는 생산직이었다.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은 사무용기기 대여업체에서 했던 프린터 A/S 관리였다.

그러다가 2014년 모 통신 대기업 엔지니어로 입사하면서, 이 직업이 제일 잘 맞아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수리를 하는 일이 자신에겐 제일 잘 맞았다. 출장을 가서 고장을 고치지 못한 날엔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고, 밤을 새면서 공부를 해서 완벽히 해결할 수 있게 준비했다. 입사 2년 뒤엔 우수 사원 표창도 받았다.

그렇게 4년을 일했다. 하지만 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평온한 삶에 만족하던 어느 날 뜻밖의 교통사고에 연루된 것이다. 지루한 재판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판결은 금고 6개월형.

그는 “음주 운전했던 것도 아니고, 제가 잘못이 없다는 조사결과도 있어서 끝까지 재판을 하려 했는데, 피해자가 보험이 없어 제가 무죄가 선고되면 한 푼도 못 받게 되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려 제가 재판을 포기했던 점도 있다”고 했다.

이미 북한과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경험했던 그는 한국 구치소는 그에 비하면 여관 같았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 다닐 생각이던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과거엔 자기 또래들이 대학에 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후회도 한다.
“수많은 일들을 해보며 내린 결론은 평생 먹고 살 자신의 직업을 갖는 것이 최고더군요. 그러자면 대학에서 배워야 했습니다.”

자신만의 평생 직업을 찾다가 정착한 곳은 영상 촬영 및 편집 일이었다. 해보니 프로그램 작업이 적성에 맞았고, 촬영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다. 스스로 공부해 지금은 홈페이지 정도는 척척 만들 수 있고 컴퓨터 수리도 자신이 있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전충일 씨가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전충일 씨가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2022년 8월 자신의 이름을 딴 ‘전일미디어’라는 사업체를 만들었다. 각종 영상 및 홈페이지 제작이 주업이다. 6개월 남짓 됐지만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은 된다.

그는 돈을 많이 벌면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지어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는 흰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젠 이뤘으니 다음 목표는 직접 짓고 인테리어까지 제 손으로 한 나만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인테리어 관련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서 건축도 자신이 있다고 했다.

통일이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어릴 적 아픈 기억들이 가득한 금채동 골안에 내 손으로 펜션을 짓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꽃제비로 내몰렸던 그곳에 금의환향해 멋진 집을 짓고 달라진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을 것이다.

24년 전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125㎝의 꼬마 꽃제비는 지금 서울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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