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두 번 버려진 생후 7개월 건우…후견인 없어 입양 대신 다시 시설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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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엿새 만인 지난해 8월 5일 서울 관악구 ‘베이비박스’(양육 포기 영아를 두는 상자)에 남겨진 김건우(가명) 군은 5개월 동안 4번이나 거처를 옮겨야 했다. 건우는 서울시의 ‘유기아동 가정보호 조치’ 적용 1호 대상으로 선정돼 보육원 대신 위탁가정을 거쳐 입양가정을 찾을 예정이었다.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없을 때 가정과 유사한 환경(입양·가정위탁)에서 자라게 한다’는 아동복지법의 취지를 반영한 것. 이후 서울시아동복지센터에서 잠시 보호를 받다 위탁가정을 거쳐 입양기관 연계 전문위탁가정까지 갔다.

하지만 올 1월 돌고 돌아 결국 서울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다. 건우가 입양되려면 후견인 동의가 필요한데 관계기관 모두 “내 관할이 아니다”라고 손사래 치며 나서지 않은 탓이다.

지자체-복지센터 ‘입양 후견인 손사래’… 5개월간 거처 4번 옮겨


다시 시설로 간 생후 7개월 건우
베이비박스 아동 첫 ‘위탁가정行’…기념행사 열고 입양 추진했지만
관계기관들은 책임 떠넘기기 급급…아동협약 “시설은 최후수단” 명시
“가정 환경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위탁가정-입양’ 책임져야”


지난해 8월 11일 서울 강남구 서울시아동복지센터에서는 아동복지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행사가 열렸다. 서울에 ‘베이비박스’가 생긴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박스에 남겨진 아동이 위탁가정에 맡겨지는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엿새 전 박스에 남겨진 김건우(가명) 군은 위탁을 맡은 오창화 전국입양가족연대 대표의 품에 안겼다.

서울시 등 관계기관은 ‘시설보다 가정에서 우선 보호한다’는 원칙에 따라 보육원 대신 위탁가정에서 입양 절차를 진행하도록 합의했고 건우는 그 ‘1호 대상’이 됐다. 하지만 건우는 위탁가정, 전문위탁가정을 거쳐 올 1월 결국 보육원에 맡겨졌다. 관계기관이 서로 관할이 아니라며 입양동의서를 발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건우뿐 아니라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 16일까지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동 31명 모두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보육원 등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 관계기관은 후견인 책임 떠넘기기


계획대로라면 건우가 오 대표 가정에서 지내는 동안 입양 절차가 진행돼야 했다. 출생신고 없이 유기된 아동이 입양되려면 부모를 대신하는 후견인의 입양동의서 발급이 필요하다. 그런데 후견인 자격이 있는 서울시아동복지센터와 관악구청은 서로 책임을 미루기 바빴다. 베이비박스 소재지인 관악구청은 “위탁가정이 관악구 밖에 있다”며 “센터가 후견인을 맡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일시 보호했던 서울시아동복지센터는 “위탁가정에 있는 아동은 센터 소속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보건복지부가 나섰다. 복지부는 “관악구청장이 후견인으로 선임되려면 법원 절차가 필요해 아동 입양이 지연되니, 센터장이 후견인이 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센터는 끝내 ‘불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 ‘시설보다 가정’ 원칙 지켜야


아동복지법 제4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아동이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없는 경우 가정과 유사한 환경(입양·위탁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도 “시설 보호는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가정 경험이 아동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 대표는 “아무리 좋은 시설도 선생님이 아이들을 1 대 1로 돌보지는 못한다. 가정은 시설과 달리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다”고 했다.

베이비박스에 남겨진 아이들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일시 보호소로 옮겨져 입양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런데 보호소에 자리가 없다 보니 바로 보육원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유기된 아동은 113명인데 보호소 정원은 10명에 불과하다. 유규용 서울시아동복지센터장은 “센터 정원을 늘리려면 보육사 증원 등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보육원에 옮겨진 경우 보육원장이 법적으로 후견인이 돼 입양동의서를 발급할 수 있다. 하지만 대기아동이 많고 입양보다 보육에 초점을 둔 곳이다 보니 보육원에 옮겨진 아동이 입양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주사랑공동체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베이비박스 유기아동 1312명 중 980명(74.7%)이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고, 입양된 아동은 139명(10.6%)에 불과하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보호소 정원을 늘릴 수 없다면 가정위탁 제도를 활용해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며 “국가가 후견인 지정 문제에 손놓고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 국가가 가정위탁 책임져야


복지부는 지난달 17일 새 유기아동 보호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보호소에 자리가 없어 보육원에 간 아동에게도 입양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보육원장에게 입양동의서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민간 보육원 등이 입양동의서 제출을 하지 않아도 강제할 방안은 없다.

독일의 경우 유기아동이 발견되면 지자체 담당 부서가 책임지고 위탁가정 연계를 맡는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통해 문의에 답한 한스베르너 마이어 독일 트리어시 복지국장은 “독일은 지자체 아동청소년국이 유기아동의 후견인이 돼 위탁가정에 연계하고, 위탁가정 부모와 관계자들이 협의해 지방법원이 입양을 결정한다”고 전했다.

베이비박스

베이비박스는 양육을 포기한 부모가 익명으로 아동을 두고 갈 수 있는 장소다. 국내에서는 2009년 12월 서울 관악구에 처음 생겼고, 경기 군포시에서도 운영 중이다. 상자 안에 아기가 누울 수 있는 침대와 보온 장치 등이 설치돼 있다.


유채연 기자 ycy@donga.com
#아동복지법#베이비박스#유기아동 가정보호 조치#위탁가정#입양가정#후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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