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군, 유족에 첫 직접 사죄…“41년간 죄책감 시달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7일 2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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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1월경 A 씨를 찾아가자 이렇게 먼저 말했다. 조사위원회는 2000~2004년 활동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건네받은 5·18당시 희생자 상황을 분석했다.



고 박병현 씨(25)는 5·18당시인 1980년 5월 23일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갔다. 회사원이던 박 씨는 친구와 함께 농사일을 도우러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가던 길이었다. 박 씨와 친구는 저수지 인근을 통과할 때 계엄군의 총격을 받았고 박 씨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친구는 의문사위에 “당시 군인들이 우리에게 왜 총격을 가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사위원회는 5·18당시 계엄군 배치현황을 분석해 노대남제 저수지를 순찰한 병력이 7공수여단 33대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조사위원회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A 씨가 발포를 한 군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A 씨는 총격 당시의 상황에 대해 “1개 중대 병력이 광주시 외곽을 차단할 목적으로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또 “작은 길을 이용해 전남 화순 방향으로 걸어가던 청년 2명이 저희들(공수부대원)을 보고 도망하기에 ‘도망가면 쏜다’고 정지를 명령했다”고 했다. 이어 “겁에 질려 도주하던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사격을 했다”고 덧붙였다.

A 씨는 “박 씨가 숨진 현장 주변에는 총기나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이 없었고 폭력을 행사한 사실도 없다. 박 씨가 단순히 겁을 먹고 도망가던 상황 이었다”고 설명했다.

A 씨는 41년 동안 마음의 병이 깊었다. 가족은 물론 주변 누구에게 5·18 당시 상황을 고백하지 못했다. A 씨가 유족들에게 사죄를 해 용서를 받으면 마음의 짐을 덜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A 씨의 사죄를 놓고 유족들과 논의가 40여 일 동안 이뤄졌다.

A 씨는 16일 오후 3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박 씨 유족들을 만나 사죄하고 화해의 자리를 가졌다. 가해자가 직접 발포해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에게 사과를 한 것이 처음이다.

가해자 A 씨는 희생자 고 박병현 씨의 두 형제를 만나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울먹였다. A 씨는 유족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41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오열했다.

이에 고 박병현 씨 형인 박종수 씨(73)는 “늦게라도 사과해주어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 하겠다”고 했다. 또 “용기있게 나서줘 참 고맙다. 과거의 아픔을 잊고 마음 편히 살아 달라”며 안아줬다. 김영훈 5·18민주화운동 유족회장은 “유족들을 대표해 용기 있게 고백을 해줘서 감사하다”라고 위로했다.

조사위원회는 그동안 활동을 통해 A 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 향후 계엄군과 유가족 상호의사가 있을 경우 사과와 용서를 하는 자리를 마련할 방침이다. 조사위원회 한 관계자는 “5·18은 피해자만 있고 가해 책임자는 없는 상태”이라며 “사병들은 부당한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던 어두운 피해자”이라고 했다. 조사위원회는 조사 목적은 진실을 토대로 화해와 용서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화해와 용서를 통해 국민통합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송선태 조사위원장은 “A 씨가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건강관리에도 힘써주길 바라며 5·18당시 작전에 동원된 계엄군들이 당당히 증언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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