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이코(koh) 패밀리” 조울증 삼부자가 전하는 위로[박성민의 더블케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7일 16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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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형제가 연 ‘마음약국’, 5천명이 위로 받다

스스로를 ‘사이코 패밀리’라고 부르는 가족이 있다. 철자는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르다. ‘psycho’ 대신 ‘psykoh’를 쓴다. 고직한 선교사(67) 가족의 성(Koh)을 딴 것. 그의 큰 아들 하영 씨(40)는 27년, 작은 아들 하림 씨(38)는 19년째 조울증을 앓고 있다. 하림 씨의 첫 증상이 나타났을 때 하영 씨가 블로그를 개설하며 ‘psykoh’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이코 형제가 아니라 ‘가족’인 이유는 고 선교사 부부도 젊은 시절 각각 신경증과 경조증을 앓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까지 조울증 진단을 받은 뒤 고 선교사는 “완전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서 끙끙 앓거나 숨기기보단 주위에 솔직하게 말하는 길을 택했다.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한 2018년 두 형제는 ‘조우네 마음약국’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그들은 입원과 치료, 회복까지 자신들의 투병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구독자는 5000명을 향해 간다. ‘조우’는 조울증에서 따 온 형의 방송용 이름이다. 자신들의 ‘평범한’ 삶이 조울증 환자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삼부자를 지난해 말 서울 강남구 옛 사랑의 교회에서 만났다.

고직한 선교사(가운데)와 하영(왼쪽), 하림 씨. 고 선교사는 “조울증 환자를 돕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고직한 선교사(가운데)와 하영(왼쪽), 하림 씨. 고 선교사는 “조울증 환자를 돕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
하영 씨는 4번, 하림 씨는 13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첫 입원은 2003년이었다. 동생의 조울증 진단에 충격을 받은 하영 씨의 조증이 심해지자 가족은 입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고 선교사는 그 때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며칠 밤을 울면서 잠을 설쳤다.

조울증은 온 가족이 함께 겪는다. 조증일 땐 본인보다 가족이 더 힘들다. 자제력이 없어지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하영 씨는 “분노조절이 힘들고, 금전적인 사고를 치기도 한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망상에 빠져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 우울증 시기는 본인이 더 힘들 때다. 두 아들을 20년 넘게 지켜본 고 선교사는 우울감과 우울증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울감이 찬 바다로 들어가면서 물이 차다는 것 정도는 느끼는 정도라면, 우울증은 물이 찬 것조차 모르고 깊은 웅덩이로 빠져드는 것 같다.”

고직한 선교사 부부가 유튜브에서 진행한 ‘줌(zoom) 토크’ 화면
고직한 선교사 부부가 유튜브에서 진행한 ‘줌(zoom) 토크’ 화면


두 아들의 위험 신호는 달랐다. 하영 씨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면, 하림 씨는 쓰나미처럼 갑자기 덮쳤다. 하영 씨는 수면장애, 식욕장애 등 전조 증상을 한동안 겪은 뒤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하림 씨는 2003년 종교적 망상으로 갑자기 조증이 왔다. 가족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질환을 앓고 있던 형이 동생의 발병을 먼저 알아챘다.

고 선교사는 ‘DUP(정신증 미치료 기간·Duration of Untreated Psychosi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병 후 치료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거나, 발병 전 불특정하게 증상들이 나타나는 전구기에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 선교사는 “조울증 환자들 상당수가 DUP가 길다고 한다. 가족들의 섬세한 관찰과 질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누구나, 한번쯤 위기가 온다.”
삼부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그나마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블루’를 겪으면서 “누구나 한번쯤 정신건강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인식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서다. 정신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면 가족이나 친구의 이상 증상을 빨리 발견할 수 있다. 조울증 등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이 생기면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냐’고 탓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울증은 자기 의지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확한 진단과, 약물·심리 치료가 필수다. 많은 사람들이 심폐소생술을 배우듯이, 이상 증세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안다면 가족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하영 씨)

세 사람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것이 걱정된다고 했다. 인간의 뇌에도 긴장과 이완이 반복돼야 하는데, 탈출구 없는 스트레스가 1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 특히 하림 씨는 그 위험성을 더 잘 안다. 하림 씨는 발병 전 1년 동안 하루 20시간 넘게 드럼 연습에 몰두했다. 좋아하는 것, 소질 있는 분야를 처음 만났다는 기쁨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하림 씨는 “마치 발화점까지 열이 올랐는데 알아차리지 못해 불이 난 것 같았다. 과부하가 걸린 줄도 몰랐다”고 했다.

유튜브 채널 ‘조우네 마음약국’에서 진행한 라이브 방송 화면. 유튜브 채널은 오디오로만 진행된다.
유튜브 채널 ‘조우네 마음약국’에서 진행한 라이브 방송 화면. 유튜브 채널은 오디오로만 진행된다.


● “스스로 약 끊는 건 위험”
유튜브에는 두 형제뿐 아니라 아내들도 출연한다. 이들은 형제의 가장 큰 버팀목이다. 재밌는 것은 이들이 겹사돈이라는 점. 자매 중 동생인 하영 씨의 부인은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있다. 2019년부터는 카카오톡에 상담 채널도 열어 현재 약 800명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대략 3분의 1은 조울증을 앓는 당사자이고, 3분의 2는 주로 가족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다. 고 선교사는 주로 환자 부모의 얘기를 들어 준다.

자살을 생각한 환자를 구한 적도 있다. 어느 날 한 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카카오톡 친구로만 등록돼 있어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 그 환자가 얼마 전에 택배로 감사 선물을 보낸 게 떠올랐다. 송장에 적힌 주소를 경찰에 알린 뒤, 직접 전화를 걸어 상대를 진정시켜 사고를 막았다.

상담에서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약 처방과 관련된 것이다. 조울증 환자들 중엔 증상이 나아지는 것 같거나 부작용이 나타나 스스로 약을 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림 씨가 13번이나 입원한 것도 부작용을 못 견딘 탓이다. 하림 씨는 부작용으로 수전증이 생겼다. 1년 동안 상태가 호전돼 스스로 약을 끊은 적도 있다. 그러다 손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수개월을 입원했다.

하영 씨는 “우울증이 지속되다가 조증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 약을 끊은 경우가 많다”며 “약을 끊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약을 처방한 의사 뿐”이라고 절대 스스로 투약 여부를 결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 치료만큼 중요한 ‘자립’
하영 씨에게 유튜브와 상담을 시작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인생의 3분의 2를 조울증을 앓았다. 이 경험을 외면하면 아팠던 과거가 다 쓸모없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형제는 지난해 국립중앙의료원의 ‘동료지원가’ 과정도 수료했다. 자신의 회복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회복을 돕는 역할이다.

삼부자는 지역사회에 정신질환자를 위한 체계적인 돌봄 시스템이나 자립 프로그램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했다. 한국의 정신건강 지원은 입원 병동 등 물리적 치료에 치우쳐 있고, 퇴원 후 지원 프로그램은 수요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조울증은 재발이 잦다. 재발을 피하려면 사회로 나와 유대감을 형성해 안정된 상태를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선교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엔 ‘약이 치료다’ ‘자유가 치료다’라고 강조했는데, 요즘에는 ‘월급이 치료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해요.” 일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지지그룹’을 만들면 안정된 상태를 더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림 씨의 ‘온리 원 콘서트’에 초대받은 관객들이 남긴 방명록
하림 씨의 ‘온리 원 콘서트’에 초대받은 관객들이 남긴 방명록


하림 씨는 음악적 재능을 이용해 환자들의 치유를 돕는 게 목표다. ‘온리 원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이미 60여 차례 공연을 해 왔다. 주로 고 선교사의 지인이 관객이다. 단 한 사람(가족)을 초대해 곡을 만들고, 무대를 꾸민다. 이 활동을 전국의 입원 병동을 찾아 공연을 해보고 싶다.

고 선교사는 “두 아들의 증상이 언제 재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울증이 완치됐다는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 비대면일지라도 서로 연대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활동의 의미를 하영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내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키우는 것을 보고 조울증 환자의 부모님들이 큰 감동을 받는 걸 봤다. 나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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