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서 양귀비 기르는 노인들,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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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걸렸네.”

서울 성동구에 사는 최모 씨(56)가 허탈한 듯 말했다. 주택 옥상으로 향하는 철문을 열고 나오다 자신을 찾아온 성동경찰서 소속 탁상수 경위와 이형주 경장을 보고선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옥상 수색을 하겠다고 하자 최 씨는 자리에 주저앉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이 올라간 15평 남짓 옥상에는 각종 화초가 가득했다. 화초 사이사이에 ‘분홍색’ 꽃잎이 보였다. ‘양귀비’였다. 최 씨는 양귀비를 몰래 기르기 위해 각종 화초를 위장막으로 사용하고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철문까지 설치해 놨다. 경찰이 최 씨가 키운 양귀비 수를 헤아려보니 새순을 포함해 1000여 주가 넘었다. 양귀비는 현행법상 마약류로 분류되고 50주 이상 기를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다.

● 시골 노인이 기르던 양귀비, 서울로 상륙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양귀비를 기르다 경찰에 적발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2일 서울 성동경찰서에 따르면 5월부터 지난달 중순까지 27명이 양귀비를 기르다 적발됐다. 경찰이 압수한 양귀비 양도 2000주에 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5년 서울 지역에서 양귀비를 기르다 적발된 사람은 2명이었다. 2017년엔 소폭 상승해 7명이 적발됐는데 최근에는 1개 파출소 관할에서만 27명이 적발되는 등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범행도 대범했다. 이번에 적발된 박모 씨(75)는 자신의 집 베란다 화단에서 양귀비 100여 주를 길렀다. 이를 감추기 위해 양귀비를 담금주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했다.

양귀비 사범은 대부분 노인층에 집중되고 있다. 2016년 기준 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양귀비 관련 범죄 사범 중 66.4%가 60대 이상이었다. 이번에 성동경찰서가 적발한 27명 역시 50대가 4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60대 이상이었다.

● 기르기 쉽고 처벌 약해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몸에 좋아서 상비약을 위해 길렀다. 쌈을 싸먹거나 물에 끓여 먹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귀비는 진통·진정작용이 뛰어나고 설사 등에 지사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양귀비는 중독성이 심하고, 환각 작용을 불러 일으켜 마약류로 분류돼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실제 단속과정에서 양귀비 씨방을 밟아 씨앗이 자신의 화단으로 떨어져 다시 자라게끔 하는 피의자들도 있다. 이렇게 집착할 정도로 양귀비에 중독 된 노인도 있었다”고 했다.

씨앗을 구하기 용이하고, 도심에서도 쉽게 기를 수 있는 양귀비 특성도 서울지역 노년층을 양귀비 범죄에 빠지게 하고 있다. 양귀비는 줄기 하나에 씨앗을 품고 있는 ‘씨방’이 여러 개 달리는데, 이 씨방 하나에 씨앗 수십 개가 들어있다. 그러다보니 양귀비를 기르는 지인을 알고만 있으면 씨앗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 해만 보여주면 양귀비는 어디서나 잘 자라, 도심의 노인들마저 양귀비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울 도심에서마저 불법이 만연하고 있지만, 처벌은 대부분 불기소 또는 벌금형에 그치고 있다. 노인들 대부분이 마약 관련 전과가 없고 초범이기 때문이다. 양귀비가 대마나 필로폰 등 다른 마약에 비해 유통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도 약한 처벌을 부추긴다. 경찰 관계자는 “양귀비는 대마나 필로폰과 달리 마약으로 유통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초범인 노인들이 집에서 상비약 개념으로 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벌은 강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김정훈기자 hun@donga.com
무안=이형주 기자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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