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직장까지 찾아와 합의 요구…성폭력 재판 길어지면 트라우마 위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3일 15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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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 선생님 있나요?”

지난달 경기의 한 학원으로 서류 봉투를 든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강사 A 씨(20대 후반)는 숨이 턱 막혔다. 그 중년 여성은 올해 초 A 씨를 성폭행한 혐의(강간)로 기소된 남성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수강생이 보는 앞에서 “합의서에 서명해 달라”고 압박하던 이 중년 여성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퇴거명령 불이행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자 그제야 교실에서 나갔다. A 씨는 “지옥 같았던 피해의 순간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고 호소했다.

A 씨처럼 성폭력 사건 후에 가해자 등으로부터 2차 피해에 시달려 정신적 고통을 겪는 피해자가 적잖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영기 장형윤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은 2014년 이후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를 찾은 17세 이상 성폭력(성폭행 및 강제추행) 피해자 105명을 6개월씩 추적 조사한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위험 점수(51점 만점)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가 필요한 수준(20점 이상)이었던 이들이 전체 105명 중 70명이었다고 12일 밝혔다. 이들 중 47명은 6개월 지난 후에도 PTSD 위험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수사와 재판이 끝나지 않은 피해자의 고통이 컸다. 피해자 중 1심까지 종료된 17명의 평균 PTSD 위험 점수는 사건 직후 평균 23.3점에서 재판 후 11.8점으로 대폭 줄었다. 반면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 피해자는 위험 점수의 감소 폭이 3.3점에 불과했다. 스스로 느끼는 신체적 건강 상태도 재판 종료 피해자는 10점 만점에 9.1점이었지만, 재판 진행 중 피해자는 5.7점 수준이었다.

연구팀은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이 길어질수록 가해자 측의 집요한 합의 요구에 시달릴 위험이 높아질 뿐 아니라 반복되는 조사와 증언 과정에서도 큰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한 30대 여성은 “경찰이 조사 중 ‘당신이 그렇게 (가해자) 앞에서 붙어 다니니까, 쉬워 보이니까 당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피해 사실을 모르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수시로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아야 했다는 피해자도 있다. 경찰은 △2차 피해를 초래하는 발언을 피하고 △추가 조사 시엔 미리 협의한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피해조사 매뉴얼’을 두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가해자 측의 접근을 막을 제도가 미흡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한 성폭행 피해 여성은 “가해자의 가족이 집으로 찾아와 합의 요구서를 편지함에 두고 갔는데, 경찰에 신고했더니 ‘직접적인 위협이 없어서 달리 조치할 게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장형윤 교수는 “성폭력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혼란과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인권 보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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