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 여직원들 “벨소리가 무서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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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상담사 ○○○입니다.”

홈쇼핑 콜센터 근무경력 3년 차 김모 씨(25·여)는 전화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고객의 궁금증과 어려움을 해소해 주기 위해 하루에도 수없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직업이건만 예고 없이 귓전을 때리는 ‘진상 고객님들’ 때문에 생긴 직업병이다.

김 씨의 병을 더욱 깊게 한 사람은 제품을 샀다가 환불하기를 수백 번 반복한 40대 남성이었다. 물건을 사려고 홈쇼핑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화풀이 대상을 찾으려고 홈쇼핑 콜센터 여성 직원에게 전화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회원 가입이 왜 이리 안 되냐”는 짜증 섞인 말투로 시작해, 깔보는 반말로 이어지기 예사였다. 그러다 “내 사업도 잘 안 풀리는데 말이야…” 하며 사적인 화풀이로 이어졌다.

김 씨는 이번 추석 근무를 앞두고 서울노동권익센터 감정노동보호팀을 찾았다. 긴 연휴로 홈쇼핑은 대목을 맞았지만 그만큼 이상한 고객을 만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김 씨는 “나를 괴롭히는 40대 남성 고객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서 다른 성인이나 남자 친척 목소리만 들어도 안 좋은 생각이 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호소했다.

콜센터 여직원 중 상당수는 20대다. 이른바 사회 경험이 많지 않다. 이를 악용해 허세를 부리는 고객도 있다. “(정수기 렌털 비용) 7만 원씩을 내가 너희한테 주는 거야, 알아?”라며 무조건 친절하라고 강요하거나, “팀장 바꿔. 당신 태도 때문에 내가 다른 회사 물건으로 바꾼다고 말할 거다”라며 협박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시감정노동보호센터에 따르면 상담 초반에 밝히는 직원 이름이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 “○○○ 씨 좀 바꿔 달라”며 계속 특정 직원이 전화를 받으라고 강요하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비슷한 나이와 이름을 찾아내 협박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서울시는 5월 서울노동권익센터를 시작으로 감정노동자를 위한 심리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7월에는 상담소 4곳을 추가로 만들었다. 11일까지 총 294회 상담이 이뤄졌다. 상담을 희망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유금분 서울노동권익센터 심리상담실장은 “자존감이 떨어지면서 불안, 수면장애,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감정노동자가 늘고 있다”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하대해도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가 보다’라고 자신을 질책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콜센터를 활용하는 업체를 규율하는 법과 노동 당국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상담은 무용지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감정노동자를 업체에 대한 고객 불만의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기업 관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피해 사례가 많아지자 국가인권위원회는 5월 감정노동에 따른 산업재해를 인정하고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도록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유 실장은 “감정노동자를 대신해 외주업체나 기업이 이 같은 진상 고객을 상대하고 법적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법률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콜센터#감정노동자#심리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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