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1cm 쪽지문’ 추적 3년… 3000개 재검색 끝에 “찾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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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노인살해 12년 미제사건 해결… 지문감정관의 세계

“일치하는 지문을 찾아라” 지난달 28일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국 증거분석실에서 지문감정관들이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과 유사해 보이는 지문의 특징점을 비교하며 일치하는지 탐색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일치하는 지문을 찾아라” 지난달 28일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국 증거분석실에서 지문감정관들이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과 유사해 보이는 지문의 특징점을 비교하며 일치하는지 탐색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난달 28일 오후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국 증거분석실. 165m²(약 50평) 남짓한 공간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울 노량진 독서실 같은 분위기 속에 중년 여성 40여 명이 각자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수십 개의 점이 찍힌 각양각색 지문이 보였다. 지문의 각 지점을 짚어내는 마우스 클릭 소리만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이들은 돋보기로 융선(지문 곡선)을 들여다보거나 각도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특징을 잡아냈다.

최근 잇따라 쪽지문(조각 지문)을 통해 장기 미제(未濟)사건 범인이 밝혀지면서 지문감정관이 ‘해결사’로 떠올랐다. 그 지문감정관이 바로 여기서 일한다. 지난달 12년 만에 구속된 ‘강릉 노파 살인사건’ 범인을 찾아낸 곳도 여기다. 3년간 유사 후보지문을 3000개 넘게 재검색했다.

분석실 끝자리에서는 강릉 노파 살인사건 범인 지문을 찾아낸 김분순 지문감정관(49·여)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융선이 갈라지거나 끊어지는 곳, 합쳐지는 곳 등을 점으로 표시해 뒀다. 특징점이다. 특징점과 특징점 방향을 나타내는 선이 여기저기 표시돼 거미줄처럼 보였다. 같은 지문을 찾기 위해선 특징점 12개 이상이 일치해야 한다.

7월 그 순간을 떠올리면 김 감정관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어어, 이거 같은데…”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한 번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같았다. 모니터 좌측 범인의 쪽지문과 우측 유사 후보지문의 특징점 15곳이 정확히 일치했다. 융선이 흘러가는 형태와 융선 사이 간격과 기울기까지 똑같았다. “찾았다!” 주변 동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범인은 그동안 용의자로 지목되지도 않던 인물이었다.

다른 감정관들이 그전 2년간 2000여 개 유사 지문을 분석했지만 일치된 것을 찾지 못했다. 현장에서 채록한 지문은 1cm 크기 쪽지문. 그것도 반쪽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테이프에 적힌 ‘점착테이프1종 9002인증업체’란 글씨가 겹쳐 분석을 더 까다롭게 했다. 20년 경력 베테랑 김 감정관은 포기하지 않았다. 쪽지문 융선 문형과 특징점을 외웠다. 방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면 무늬가 ‘범인 지문’으로 보였다. 1000개에 이르는 유사 후보지문을 추가로 확인했다.

지문 분석은 몸이 고된 일이다. 감정관들 책상에는 대부분 약통이 하나씩 놓여 있다. 10시간 이상 확대경과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람에 눈 건강이 좋지 않다. 일반인보다 노안도 빨리 온다.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려 보는 감정관도 보였다. 상상도 범인 지문을 찾는 데 좋은 방법이다. 김 감정관도 강릉 노파 살인사건 범인이 어떻게 테이프를 잡았을지 상상하며 지문을 추적했다. 지역과 나이, 손가락 위치 등 조건을 다양하게 바꿔 가며 후보군을 좁혔다. 책상에 놓인 추리소설을 손에 든 그는 “추리소설에서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을 익힌 것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조대희 증거분석계장은 “자동지문검색시스템(AFIS)으로 불리는 지문 검색기술이 향상됐고 감정관들 노력이 결합돼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AFIS는 현장 지문과 유사점이 높은 순서대로 점수를 매겨 후보지문을 추출해 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AFIS 분석 전후 과정은 감정관들 몫이다. 하나하나 육안으로 지문을 비교, 대조하고 최종 판정해야 한다.

감정관들이 대부분 손목에 보호대를 찬 까닭도 여기에 있다. 1mm라도 다른 곳에 특징점을 찍으면 배열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일치하는 지문이 없으면 마우스로 특징점 찍는 과정을 반복한다. 긴장된 상태로 하루 10시간가량 이렇게 하다 보면 손목에 병이 날 수밖에 없다. 손목터널증후군이 ‘직업병’이다. 하루 평균 1인당 2건도 안 되는 지문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치하는 지문을 수사팀에 넘겨도 끝은 아니다. 발뺌하는 범인 때문에 법정 증인으로 서기도 한다. 30년 경력 전모 감정관(49·여)은 “법정에서 ‘실수한 거 아니냐’며 취조를 당하거나 보복 위험 때문에 압박감도 느낀다”고 털어놨다. 지문만 보다 보니 특이한 습관도 생겼다. 전 감정관은 “공공장소에서는 지문이 남지 않게 물건을 잡고 혹여 지문이 남으면 옷으로 닦은 뒤 이동한다”고 말했다.

수사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지만 자부심만큼은 대단하다. 공소시효가 1년도 남지 않은 ‘구로구 호프집 살인사건’ 범인을 역시 쪽지문으로 찾아낸 천소라 감정관(49·여)은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 생각에 새벽까지 남아 지문을 좇게 된다”며 “내 눈이 버텨주는 한 지문 분석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쪽지문#미제사건#지문감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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