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서 동료 잃은 아픔에 가슴 찢어져도… 그게 소방관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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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 순직 ‘강릉 석란정 화재’… 함께 진압했던 119대원이 전한 상황

큰 불은 꺼졌다. 건물 바닥에서만 불길이 조금 보였다. 고비는 넘긴 셈이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곳곳에 숨은 불씨가 언제 되살아날지 모른다. 잔불 제거도 어렵다. 목조건물은 천장을 뜯고 물을 뿌린다. 문화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석란정(石蘭亭)은 문화재가 아니지만 보존 가치가 높았다.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직접 건물 안에 들어가야 했다. 잔불 제거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17일 오전 4시경 강원 강릉소방서 A 소방위(47)는 다른 소방관 3명과 함께 석란정 안으로 들어섰다. 3명 중 2명이 숨진 이영욱 소방위(59)와 이호현 소방사(27)다. 고인이 된 두 사람은 석란정에서 가장 가까운 경포119안전센터(경포센터), A 소방위와 나머지 1명은 조금 거리가 있는 다른 119안전센터 소속 진압대원이다.

앞서 A 소방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불길은 거의 잡힌 상태였다. 이 소방위와 A 소방위는 잘 아는 사이다. 경력도 각각 30년, 21년으로 선임급이고 안전센터 위치도 멀지 않아 화재 현장에 함께 출동한 경우가 많았다. 베테랑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진압대원 4명은 잔불 제거를 위해 건물 내부에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바닥을 뜯어낸 뒤 물을 넣으려는 것이었다. 나무로 된 바닥의 불길을 잠재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바닥을 뜯고 물을 넣는 것까지 성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A 소방위가 조금 먼저 밖으로 나왔다. 혹시 외부에 잔불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다. 이 소방위 등 나머지 3명도 뒤를 따랐다. 출입구까지 두세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꽝’ 하는 굉음이 이어졌다. 굵은 기둥과 기왓장이 이 소방위와 이 소방사를 덮쳤다. 손쓸 틈이 없었다. 나머지 대원 한 명은 머리에 기왓장을 맞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A 소방위는 “보통 건물이 무너질 때 기우뚱하거나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데 그날은 아무것도 없었다”며 “몇 초 차이로 두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는 살았다”며 괴로워했다.

21년 동안 A 소방위는 현장에서 다치는 동료를 많이 봤다. 하지만 눈앞에서 동료가 죽음을 맞은 건 처음이었다. 특히 이 소방위의 순직은 큰 충격이었다. 같은 119안전센터 소속은 아니지만 이 소방위는 특별한 선배 중 한 명이었다. 긴박한 현장에서 당황하지 않고 늘 차분하게 후배들을 이끌며 화재를 진압하던 선배였다. 18일 119안전센터에서 만난 A 소방위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힘겨워했다. 그는 “(동료를 보낸 아픔이) 아마 평생 남을 것 같다”라며 “(트라우마도) 소방관이 짊어져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경찰과 소방당국,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석란정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한 합동감식을 벌였다. 현장에서는 페인트 등 인화물질이 담겼던 것으로 보이는 용기 4개가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석란정 관리자 소유로 화재의 직접 원인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했다. 석란정은 근처에 사는 이모 씨(80)가 관리하며 창고로 쓴 것으로 조사됐다. 전기설비가 있지만 수년 전 단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강원 강릉의료원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김 장관은 유족을 위로한 뒤 “두 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번에는 제도 개선을 확실히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재 지방직 신분으로 광역자치단체 소속인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바꾸는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강릉=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소방관#강릉 석란정 화재#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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