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원조 ‘사랑의 밥차’ 요리사 채성태씨 “요리와 봉사 공통점은… 재미와 위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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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전 낚싯배 전복 구사일생
‘사회에 필요한 사람’ 다짐했지만
식당 열고 돈 버느라 잊고 지내
지인 요청으로 전복죽 봉사 시작
‘사랑의 밥차’ 어느새 17년째 운영

요리사로 17년째 사랑의 밥차를 운영 중인 채성태 씨는 주말마다 밥차 요청이 오는 곳을 다니며 요리를 한다. 최근에는 주중에도 요청이 들어온다. 채 씨는 “요리는 즐거움이고, 봉사는 중독이다”라고 말했다. 채성태 씨 제공
요리사로 17년째 사랑의 밥차를 운영 중인 채성태 씨는 주말마다 밥차 요청이 오는 곳을 다니며 요리를 한다. 최근에는 주중에도 요청이 들어온다. 채 씨는 “요리는 즐거움이고, 봉사는 중독이다”라고 말했다. 채성태 씨 제공
생닭과 전복을 넣고 끓여 최근 몇 년 사이 여름 보양식의 하나로 떠오른 해천탕. 전통 요리로 아는 이가 많지만 엄연히 개발자가 있다. 요리사 채성태 씨(50)가 1997년 개발해 특허청에 상호 등록까지 마쳤다.

그의 ‘원조’ 이력은 하나 더 있다. 2001년부터 운영 중인 ‘사랑의 밥차’다. 대형 요리트럭을 이용해 즉석에서 요리해 봉사 활동을 하는 밥차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그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11일 서울 강동구 세창정형제화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도 그는 현대백화점과 함께 발 모양이 기형인 10여 명에게 특수 신발을 신겨 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요리를 통한 봉사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는 20여 년 전만 해도 요리, 봉사와는 거리가 먼 인생의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1996년 친구들과 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 배가 뒤집히는 사고를 겪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추운 겨울날 물에 빠진 뒤 살기 위해 헤엄을 쳐서 뭍으로 갔다. 그 찰나, ‘살려만 준다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충남 태안에 횟집을 차렸다. 해녀들의 도움으로 전복을 제대로 접했고, 갖가지 전복 요리를 시도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생으로 먹는 것을 빼면 전복 요리는 거의 전무했다. 홍콩, 일본을 다니며 전복을 연구한 뒤 서울로 올라가 서울 이태원에 전복집을 차렸다. 그의 식당은 그가 개발한 해천탕이 입소문을 타면서 일본과 홍콩 등 해외에서도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그 식당이 푸드 관련 전문지와 여러 매체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졌죠. 백화점에도 입점해 한 달에 수천만 원을 쉽게 손에 쥐었죠. 그런데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명의 약속’은 잊어버렸죠.”(채 씨)

그러던 1998년 자원봉사에 필요하다며 지인의 전복죽 협찬 요청이 들어왔다. 막연하게 50인분을 준비해 갔다. 그는 “노인들에게 차가운 죽을 주면서 그때서야 내가 2년 전 맹세한 약속이 떠올랐다”고 했다. 이후 그는 수시로 복지시설에 전복죽을 들고 찾아갔다. 찬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생각이 대형 요리트럭 구상으로 이어졌다.

2001년부터 3.5t 트럭을 구입해 사랑의 밥차를 꾸민 그는 평소 알고 지내는 연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현재 사단법인 ‘사랑의 밥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해까지 소득의 절반 정도를 여기에 쓰고 있다.

국내를 넘어 캄보디아에서도 봉사활동을 하며 2014년 식당을 접었던 그는 지난해 말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조그마한 식당을 다시 열었다. 음식을 매개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같은 식당이 필요하다는 가까운 연예인과 음식 전문가, 단골들의 요청 때문이었다.

“요리하는 재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정말 기쁘죠. 요리와 봉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항상 바다에서 맹세한 그 약속을 잊지 않도록 되새깁니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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