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한]빈말 3년, 국립트라우마센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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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 정책사회부 차장·의사
이진한 정책사회부 차장·의사
2010년 1월 가난한 나라 아이티에서 생긴 대지진으로 20여만 명이 사망한 참극의 현장에 의료봉사와 취재를 위해 갔다. 큰 상처를 입고 치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선 부상자들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병원 수술방엔 파리와 사망자가 공존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도미노처럼 쓰러진 수많은 건물들은 마치 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당시 비극의 현장들이 생생하다. 만약에 이런 끔찍한 상황들이 매일 꿈에 나타나고, 이 때문에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면…. 아마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PTSD는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으로 입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직접적 원인이 된 정신질환이다. 트라우마를 앓았던 당시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공포와 우울증, 공황장애, 알코올 사용 장애 등을 동반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다. 또 PTSD는 사건이 생긴 지 2, 3년이 지나면서 더욱 악화돼 자살 등 극단적인 행동을 시도할 수 있는 만큼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참혹한 사고 현장을 누벼야 하는 소방공무원의 경우 5명 중 1명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술로 해결하며, 전체 소방공무원의 39.7% 정도가 우울증으로 고통받는다. 실제로 2008년부터 2011년 7월까지 26명의 소방공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끔찍한 범죄 현장을 수없이 봐야 하는 경찰 과학수사요원은 10명 중 2명이 PTSD에 시달린다. 하지만 경찰의 심리치료 시설은 전국에 4곳에 불과하고, 증상이 악화돼도 그냥 참고 지나치는 요원이 부지기수다. 국가 공무원조차 이런 상황이니 대형 참사로 인한 일반인 생존자와 유가족의 PTSD 치료와 관리는 오죽할까.

전문적으로 PTSD를 치료하고 컨트롤하는 국가 차원의 의료 시스템은 아예 전무하다. 최근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성명서를 내 세월호 비극 관련 일반인 생존자에 대한 추적 관찰과 치유 프로그램 운영이 필요하니 국가적인 시스템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9·11테러 이후 미국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일본이 모든 피해자를 대상으로 10년 이상의 장기적 건강 및 정신건강 조사를 국비로 진행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발생한 지진해일(쓰나미)로 많은 인명이 희생된 태국은 방콕에 ‘쓰나미 PTSD 센터’라는 비영리 기구를 설립했다. 쓰나미 생존자 및 희생자 가족뿐만 아니라 목격자들의 PTSD 조기 관리를 위해서였다.

세월호 사건 당시 당국은 피해자 치료 결과와 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중앙심리외상지원센터를 3년 안에 구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결국 ‘빈말’이었다. 현재 국가 재난 때 PTSD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곳은 국립서울병원의 중앙재난심리지원단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하는 인력은 고작 10여 명이며, 그나마 팀원들은 평소 북한 이탈주민, 학교폭력 등 다른 업무에 집중한다. 그러다가 큰 재난이 생기면 PTSD 팀이 꾸려지는 임시방편 조직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외국처럼 PTSD에 대한 조사 연구 및 지속적인 환자 관리는 꿈도 꾸기 어려운 형편이다.

보건당국은 중앙재난심리지원단을 트라우마센터의 컨트롤타워라고 우길 게 아니라 속히 트라우마센터 설치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립 트라우마센터’를 속히 만들어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듬는 것이 바로 국가가 할 일이다.

이진한 정책사회부 차장·의사 likeday@donga.com
#국립트라우마센터#ptsd#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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