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답만 찾는 ‘속도전式 평가’로는 창의력 못 키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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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붕괴]<4·끝> 수학교육 바꿔야 희망 있다

지난 두 달간 수학 교육이 붕괴된 현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이 예외 없이 동의한 것이 있다. “수학 수업을 지금처럼 해서는 절대 안 되며, 수학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와 자신감을 살리려면 당장 평가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가 개혁이란 단순히 ‘시험이나 수능 문제를 쉽게 하느냐, 어렵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째 관행처럼 굳어진 ‘50분 동안 25문제 풀기’와 같은 속도전 중심의 평가를 과연 알파고 시대에도 계속할 것인지, 또 사고 과정을 전혀 보지 않고 최종 답만 따지는 객관식 평가를 여전히 최적의 평가라 볼 수 있는지 등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옥기 성균관대 수학교육과 명예교수는 “교육부가 과정 중심 평가를 한다지만 우리처럼 1시간에 30문제씩 푸는 시험 환경에선 토론식 수업도, 진정한 수행평가도 될 수 없다”며 “수행평가를 잘하기로 유명한 영국은 중간 수준의 난이도 문제 하나에 20분을 주고, 한 시간 동안 두세 개만 풀게 한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현재 한국에서 수학 문제란 ‘주어진 조건 외에는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인데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한국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를 구하라’라는 문제를 낼 때 △달린 속도 △들른 휴게소 횟수까지 준 뒤 거리를 구하게 한다. 공식을 통해 빠르게 문제를 풀어야 하고 답은 1개만 존재한다.

그러나 과정 중심 평가가 발달한 나라에선 같은 문제라도 접근 방식이 전혀 다르다. 서울과 부산 간 거리를 구하라는 문제라도 풀이법은 학생 각자가 찾는다. 인터넷을 검색하든, 지도상 거리를 자로 재 축척을 활용하든 다양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교사는 바로 이런 사고와 토론의 ‘과정’을 평가한다. 강 교수는 “외국이나 우리나 이름은 같은 ‘수행평가’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교 수업은 기초 수준으로 하고 시험에는 선행 문제 등 고난도 문제를 섞어 ‘억울한 서열화’를 만들고 수포자를 낳는 ‘반칙 평가’는 일종의 ‘신문고’ 같은 걸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제재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있었다. 교육청이 관리감독을 해야 하는데도 제대로 하지 않는 만큼, 강한 압박수단을 만들어야만 원리와 사고 중심의 수학 수업을 정착시키기 위한 당국의 노력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거의 모든 교사는 자신의 학창 시절은 물론 교사가 된 뒤에도 속도전 위주의 객관식 평가만 경험한다. 이 때문에 기존 수업 방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합하는 양질의 공교육을 위해 강도 높은 교사 재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학교 선생님은 학원 선생님보다 훨씬 못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이를 뒤집을 강력한 재교육 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야만 과정 중심 평가도, 부분 점수를 인정하는 주관식 문제 출제도 가능하다”며 “교사에 대한 외부의 신뢰가 확보되지 않으면 점수를 바꿔 달라는 민원만 여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친화적인 수학 교육을 위해 수십 년간 관행적으로 써 온 수학 용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소인수분해’ ‘법선벡터’ 등 일본어를 그대로 번역해 처음 들으면 그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학 용어가 너무 많다. 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대생 이상훈 씨는 “학창 시절 수학 공부를 할 때 개념 이해보다 용어 이해가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인 만큼, 수학 교육에 그에 부합하는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전문가도 많다.

국내 수학 교육과정을 만드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이환철 수학교육개발실장은 “호주에만 가도 일반 교실에 학생용 컴퓨터가 두 대씩 있고 수업하다 궁금한 것은 학생 스스로 찾는다”며 “국내 교육당국은 새로운 것 들이기를 극히 꺼리는 탓에 20년 넘게 교사용 컴퓨터와 TV, OHP 기기가 전부”라고 꼬집었다.

국내 학생들은 연산속도를 높이기 위해 취학 전부터 연산학원을 다니며 무한 문제풀이를 한다. 수업 시간이나 시험에선 계산기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실장은 “수학 교육과정은 25년 전부터 수학 시간에 계산기를 써도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이 ‘허락’이 떨어진 게 한참 전인데 아직도 계산 위주의 수학 평가가 이뤄지는 건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 역시 “각 학교의 교과협의회에서 결정만 하면 시험 시간에도 계산기를 쓸 수 있다”며 “학교와 교사가 민원 등을 우려해 쓰지 않다 보니 사문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훈 부산대 수학과 교수는 “세계적인 논문을 쓰는 수학자들과 교류해 봐도 계산 속도와 수학 능력은 전혀 관계가 없다”며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논리적 사고, 새로운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
#수학#교육#붕괴#평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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