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苦에 친구도 없어 텅 빈 農心… 약 타러 가려면 왕복 6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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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감기’ 우울증 이기자]<上>우울증 깊어가는 농어촌 노인들

대낮인데도 볕이 잘 들지 않는 단칸방에 모로 누워 있던 이모 씨(83·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금 누가 문 두드리지 않았소?” 하지만 2일 오후 이 씨가 사는 충남의 한 농촌 마을은 적막했다. 4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몸이 된 뒤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이 씨는 가끔 환청을 겪지만 찾아오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한층 더 우울해진다. 이 씨는 “누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했다.
○ 우울 증세 보이면 병원 진료 대신 굿판

한국인의 조기 사망 원인 2위는 자살이다. 간암 폐암보다 순위가 높다. 자살자 10명 중 6명이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보건복지부 통계에 비춰 보면 한국에선 우울증이 웬만한 암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인 셈이다. 2010년 51만 명이었던 국내 우울증 환자는 2012년 58만 명을 넘은 뒤 지난해 처음으로 60만 명을 돌파했다.

우울증 환자의 비율은 이 씨가 사는 충남처럼 만성질환과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이 많은 농어촌에서 특히 높았다. △대화 상대가 적고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자신이 치료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잘 모르는 데다 △어려운 형편 탓에 선뜻 치료를 받지 못하고 △치료를 결심해도 정신건강의학과를 갖춘 병·의원이 너무 멀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충남 금산군에 사는 김모 씨(70)는 30년 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온 아내를 보살피다 자신도 우울증에 걸린 사례다. 김 씨의 아내는 ‘귀신 들렸다’는 손가락질 탓에 굿판까지 벌였지만 제대로 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고, 5년 전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김 씨도 술에 의존해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할 뻔했다가 몇 해 전에야 마을회관을 찾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고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 씨는 친구들이 하나둘 대전으로 떠나 주변엔 대화 상대도 없었다.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가 처음 증상을 보인 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기까지는 평균 3년 2개월이 걸리고 이 기간에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경우는 60%가 넘는다.
○ ‘정신건강의학과 무의촌’ 전국 44곳

농어촌 중엔 진료를 받아 보고 싶어도 주변에 정신건강의학과가 없어 환자들이 우울증 증세를 키우는 곳이 적지 않다. 충남의 한 지역에 사는 박모 씨(70·여)는 우울증 약을 처방받으려면 ‘산 넘고 물 건너’ 대전까지 가야 한다. 왕복 6시간 넘게 걸리지만 읍내에 딱 한 군데 있는 정신건강의학과까진 대중교통이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신건강증진센터를 방문해 상담을 받지만 이곳은 의료기관이 아니라서 약을 처방받을 수도 없다.

충남 서천군은 지난해 우울증 환자가 1882명이었지만 정신건강의학과를 갖춘 병·의원이 1곳에 불과했다. 정신건강의학과 1곳당 돌봐야 하는 우울증 환자가 1000명이 넘는 기초단체는 경기 파주시, 부산 기장군, 충남 예산군 등 19곳이나 됐다.

2014년 자살자 1만3836명의 주소지와 정신건강의학과 1407곳의 분포를 분석해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가 가장 많았던 기초단체 20곳 중 14곳은 정신건강의학과가 한 곳도 없는 ‘무의촌’이었다. 이처럼 정신건강의학과가 한 곳도 없는 시군구는 총 44곳이다. 이곳에 사는 우울증 환자 2만3854명은 우울증 약을 한 번 처방받으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주변 시군구까지 가야 했다는 뜻이다. 이들 44곳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평균 36.2명으로 전국 평균(27.3명)보다 높았고, 이 중 41곳(93.2%)은 5년 새 우울증 환자의 비율이 평균 44% 늘었다.
○ ‘마음 주치의’ 정책은 무산 위기

우울증 환자 비율이 높은 농어촌 지역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경제가 침체돼 있다는 점이다. 금산군 논산시 공주시 등은 대전과 세종시가 발달하면서 노동인구가 유출됐고, 정신건강 치료 인프라도 발전이 멈췄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우울증 위험군의 비율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충남지역의 우울증 환자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나마 지방자치단체가 홀몸노인 등을 방문해 우울증 검사를 받게 하는 등 숨어 있는 환자를 찾아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영문 전 국립공주병원장은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울증 검사를 해보면 결과가 심각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직설적인 표현을 꺼리고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충남 특유의 문화가 정신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쳤지만 최근 지자체의 노력으로 개선의 여지가 생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이 같은 농어촌의 지역적·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올해 초 ‘정신건강종합대책’을 발표하며 지역에서 ‘정신 보건소’ 역할을 하는 정신건강증진센터 224곳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배치하는 ‘마음 주치의’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예산이 부족해 시행이 불투명한 상태다.

금산=김호경 kimhk@donga.com·조건희 기자

※ 분석 자문단 명단(가나다순)

강도형 서울대병원 교수, 나해란 서울성모병원 교수, 박종일 전북대병원 교수, 이동우 상계백병원 교수, 이영문 전 국립공주병원장, 이준영 서울대 보라매병원 교수,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교수, 한창수 고려대 안산병원 교수, 홍순상 한음한방신경정신과 원장,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교수(이상 정신건강의학과), 김윤태 고려대 교수, 이병훈 중앙대 교수(이상 사회학과)
#생활고#우울증#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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