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은 세번 죽어… 병걸렸을때, 죽은뒤 해부될때, 화장될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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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도 하지 않고 낙태 수술” 소록도 100년 恨 토해내다
‘강제 낙태 등 피해’ 재판… 서울고법 현장 검증 나서

20일 전남 고흥군 도양읍 국립소록도병원 검시실 안에서 현장검증에 참가한 한센인 이남철 씨가 마이크를 들고 서울고법 민사30부 
판사들과 원고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 등에게 한센인 시신 해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소록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20일 전남 고흥군 도양읍 국립소록도병원 검시실 안에서 현장검증에 참가한 한센인 이남철 씨가 마이크를 들고 서울고법 민사30부 판사들과 원고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 등에게 한센인 시신 해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소록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소록도에는 단 하나의 묘가 있다. 한센인의 주검을 화장한 뒤 안치하는 ‘만령당’이라는 봉안당 뒤에 위치한 작은 산소다. 죽은 뒤 유골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만령당에 안치했다가 산소에 뿌린다.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만령당에 안치돼 있거나 산소에 뿌려진 사람만 지난해 10월까지 1만942명이다.

판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산소를 향해 짧은 묵념을 올렸다. 현장 검증 안내를 맡은 한센인 이남철 씨(58)는 판사들을 향해 “소록도 사람들은 세 번 죽는다고 말한다”며 “한센병 때문에 고통 겪고, 죽어서 해부되고, 해부된 뒤 화장된다”고 설명했다.

20일 오후 ‘강제 낙태·단종 수술 피해 한센인’ 손해배상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30부(부장판사 강영수)가 현장 검증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한 지 100년이 흐른 이래 재판부가 소록도 현장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와 변호인단 등은 현지 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소록도 내 주요 장소 7곳을 직접 돌아봤다. 한센인 부모가 미감아(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와 한 달에 한 번 2∼3m의 거리를 두고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는 ‘수탄장’과 도망가려 했거나 문제를 일으킨 한센인을 가뒀던 ‘감금실’ 등 주로 한센인의 아픔과 상처가 깃든 곳들이다.

이날 재판부는 현장 검증 외에 특별 재판을 열어 한센인 환자 및 당시 의료진 등 증인 4명에 대한 증인신문도 진행했다. 재판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통해 △단종·낙태가 국가 정책적으로 시행됐는지 △환자 본인의 의사와 관련 없이 강제됐는지 등 쟁점 사항에 대한 양측 의견을 들었다.

원고와 피고 측은 한센인의 비극에 대한 아픔은 공유했지만 한센인 단종 수술의 강제성에 대해서는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소록도에서 낙태 수술을 한 차례 받았던 70대 여성 A 씨가 나와 낙태 수술을 받을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A 씨는 “임신을 하자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다”며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피도 많이 흘렸으나 수술 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소록도병원과 여수애양병원에서 30년간 한센인을 치료했던 김인권 원장(65)은 이날 증인으로 참석해 “당시 정관 수술을 안 한 사람들은 소록도 밖으로 내몰렸기 때문에 환자들을 위해 수술을 해줘야만 했다”며 “국가나 당시 종사자들로 인해 피해를 본 한센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고려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별 기일을 마친 뒤 원고(한센인) 측 변호인은 “소록도까지 내려와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 주신 점 고맙다”며 “실제 진실에 접근해 한센인 입장에서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에 피고(정부) 측 변호인은 “이 소송의 실질적 원고는 한센인들의 치료를 맡은 의료진과 봉사자들”이라며 “한센인의 아픔도 치유되어야 하지만 그간 고생한 분들의 명예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소송을 포함해 강제 낙태·단종 수술로 피해를 본 한센인 500여 명이 2011년부터 국가를 상대로 5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소록도=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한센인#소록도#인권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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