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도 하지 않고 낙태 수술” 소록도 100년 恨 토해내다
‘강제 낙태 등 피해’ 재판… 서울고법 현장 검증 나서
소록도에는 단 하나의 묘가 있다. 한센인의 주검을 화장한 뒤 안치하는 ‘만령당’이라는 봉안당 뒤에 위치한 작은 산소다. 죽은 뒤 유골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만령당에 안치했다가 산소에 뿌린다.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만령당에 안치돼 있거나 산소에 뿌려진 사람만 지난해 10월까지 1만942명이다.
판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산소를 향해 짧은 묵념을 올렸다. 현장 검증 안내를 맡은 한센인 이남철 씨(58)는 판사들을 향해 “소록도 사람들은 세 번 죽는다고 말한다”며 “한센병 때문에 고통 겪고, 죽어서 해부되고, 해부된 뒤 화장된다”고 설명했다.
20일 오후 ‘강제 낙태·단종 수술 피해 한센인’ 손해배상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30부(부장판사 강영수)가 현장 검증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한 지 100년이 흐른 이래 재판부가 소록도 현장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와 변호인단 등은 현지 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소록도 내 주요 장소 7곳을 직접 돌아봤다. 한센인 부모가 미감아(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와 한 달에 한 번 2∼3m의 거리를 두고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는 ‘수탄장’과 도망가려 했거나 문제를 일으킨 한센인을 가뒀던 ‘감금실’ 등 주로 한센인의 아픔과 상처가 깃든 곳들이다.
이날 재판부는 현장 검증 외에 특별 재판을 열어 한센인 환자 및 당시 의료진 등 증인 4명에 대한 증인신문도 진행했다. 재판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통해 △단종·낙태가 국가 정책적으로 시행됐는지 △환자 본인의 의사와 관련 없이 강제됐는지 등 쟁점 사항에 대한 양측 의견을 들었다.
원고와 피고 측은 한센인의 비극에 대한 아픔은 공유했지만 한센인 단종 수술의 강제성에 대해서는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소록도에서 낙태 수술을 한 차례 받았던 70대 여성 A 씨가 나와 낙태 수술을 받을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A 씨는 “임신을 하자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다”며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피도 많이 흘렸으나 수술 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소록도병원과 여수애양병원에서 30년간 한센인을 치료했던 김인권 원장(65)은 이날 증인으로 참석해 “당시 정관 수술을 안 한 사람들은 소록도 밖으로 내몰렸기 때문에 환자들을 위해 수술을 해줘야만 했다”며 “국가나 당시 종사자들로 인해 피해를 본 한센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고려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별 기일을 마친 뒤 원고(한센인) 측 변호인은 “소록도까지 내려와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 주신 점 고맙다”며 “실제 진실에 접근해 한센인 입장에서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에 피고(정부) 측 변호인은 “이 소송의 실질적 원고는 한센인들의 치료를 맡은 의료진과 봉사자들”이라며 “한센인의 아픔도 치유되어야 하지만 그간 고생한 분들의 명예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소송을 포함해 강제 낙태·단종 수술로 피해를 본 한센인 500여 명이 2011년부터 국가를 상대로 5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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